최승호(56) 시인이 열세 번째 시집 <북극 얼굴이 녹을 때> (뿔 발행)를 냈다. <고비> (2007) 이후 3년 만의 신작 시집이다. 하지만 <고비> 가 2006년 열흘 간 고비사막을 여행하며 받은 강렬한 인상을 집중적으로 시로 풀어낸 작업의 산물임을 감안한다면, 이번 시집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2003) 출간 이후 7년 동안의 그의 시적 행로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 고비> 고비> 북극>
시적 대상과 항시 거리를 두는 냉정함, 세심한 관찰력, 생의 진실을 꿰뚫는 직관력 등 최씨를 일급 시인으로 자리매김케 한 그의 시적 특질이 이번 시집에도 고스란하다. 대도시의 공허함,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의 고독을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포착한 작품들이 많은 것도 예전 시집들과 궤를 같이 한다.
최씨는 밤마다 취해 사는 도시 사내들을 술 빚는 재료로 쓰이는 벌레에 빗댄다. '데킬라 몬테알반 술병 속에는/ 선인장 애벌레가 들어있다/ 날마다 술에 절어/ 바닥에 누워 있는 벌레,/ 술꾼들은 그 미해탈의 나비를 씹어먹곤 한다'('취한 밤'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시적 화자의 고독을 황량한 바닷가 풍경에 은유한 빼어난 시다. '바다는 온통 잿빛이다/ 어두운 하늘에서 희미하게 별이 돋기 시작한다// 텅 빈 해안에는/ 고독이라는 거대한 등뼈가 솟아 있다/ 그것은 발이 두 개다/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그것은 느릿느릿 걸어다닌다'
소설가 김연수씨가 한국일보에 연재 중인 '시로 여는 아침'에 최근 소개된 최씨의 시 '칸나'는, 그가 견고하게 유지했던 시적 대상과의 거리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시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 칸나 속으로 들어가서 칸도 없고 나도 없는 칸나의 마음으로 말이다. 칸나!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다.' 최씨도 이 시에 애착이 간다고 했다. "제주도 현무암 돌담 아래 핀 빨간 칸나를 보고 시를 쓰려고 오랫동안 생각해 오다, 문학적 기교 없이 있는 그대로 풀어쓴 시다. 나로선 매우 이례적이면서도 의미있는 시도였다."
4월 중 최씨의 신작 시집 한 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아메바> 라는 제목의 이 시집은 그가 기존에 발표한 시 60편가량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한 시들로 채워진다. 예컨대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로 부둥켜 안고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오징어 3')라는 시를 '그 오징어 부부는/ 싸울 때/ 서로 얼굴에 먹칠을 한다' 등 여러 형태로 다시 쓰는 식이다. 부단한 시적 실험을 해온 최씨다운 작업이다. "15년 전인가 국내에서 프랑스 전위 미술가 마르셀 뒤샹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전시 작품 중 하나가 뒤샹의 기존 작품을 축소 제작한 모형들을 담은 여행가방이었다. 그처럼 내 작품을 대상으로 또다른 작품을 만들어 봤다." 아메바>
최씨는 의미 대신 읽는 맛을 최대한 살린 동시로 '동시 창작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호평을 받은 <말놀이 동시집> (전5권) 출간 작업을 지난 연초에 마무리했고, 지난해 가을 학기부터는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내에 독일, 아르헨티나, 일본, 스페인에서 그의 시집이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그는 "당분간 창작보다는 새로운 시를 모색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고 했다. 말놀이>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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