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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8> 진보세력의 발전을 가로막은 '이념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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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8> 진보세력의 발전을 가로막은 '이념논쟁'

입력
2010.04.0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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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유화국면'이 도래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민주화투쟁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으나, 이와 함께 운동권에는 이념(사상)논쟁이 치열했다.

흔히 이념논쟁은 운동의 과학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러기보다는 민주화운동을 어렵게 한 측면이 훨씬 더 컸다고 본다.

이념논쟁은 운동권을 분열시키기도 했지만 시간과 열정을 엉뚱한 데 소진케 했다. 이념논쟁으로 밤을 샌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념논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범람을 가져와 진보세력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재야 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이념논쟁에 따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범람은 독재정권에게 탄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해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사람들은 역사적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80년대 중반의 이념논쟁은 민청련에서 제기한 'CNP논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민청련은 민주세력을 시민민주주의혁명(civil democratic revolution:CDR), 민족민주주의혁명(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NDR), 민중민주주의혁명(people's democratic revolution:PDR) 세력으로 분류하고, 민주통일국민회의를 CDR로, 민청련을 NDR로, 사회주의혁명세력을 PDR로 규정하면서, 당시의 정세에서는 민청련이 지향하는 NDR가 가장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이런 분류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이론적 근거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있었다. 그래서 민청련에 의해 제기된 'CNP 논쟁'은 운동권에 마르크스-레닌주의(사회주의)가 범람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땅의 자칭 진보세력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도 됐다.

물론 CNP논쟁이 이념논쟁을 촉발하기 전에 이미 이념논쟁이 가열될 상황은 조성되어 있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유화국면'과 함께 나타난 전반적인 자유화 분위기 속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들이 대량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청년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경도되게 했다.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운동권에 범람해도 이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군사독재정권의 좌경용공 탄압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범람을 가속화했다.

그런데 자칭 진보세력의 경우 80년대에는 시대상황에 짓눌려 그랬다 치더라도 지금은 그러지 않아야 하겠는데 아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진보세력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진정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실하다면 지금은 바뀌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운동권의 교조주의적 경향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이념의 정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운동권이 '3대 편향'과 '3대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는데, '3대 편향'이란 교조주의, 개량주의, 기회주의를 말하고, '3대 콤플렉스'란 학생운동 콤플렉스, 노동운동 콤플렉스, 북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학생운동권에서 어떤 주장이 나오면 그것을 따르기가 바쁘고, 노동운동권에서 어떤 주장이 나오면 역시 그것을 따르기가 바쁘며, 북한에서 무슨 주장을 하면 그것을 따르기가 바쁠 뿐 그것을 비판하거나 그것에 배치되는 주장은 일체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3대 편향'과 '3대 콤플렉스'는 모두 교조주의 곧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장 주체적이어야 할 운동권이 가장 비주체적임을 의미한다.

더 개탄스러운 건 내심으로는 사회주의 신봉이나 북한정권 추종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청년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신봉이나 북한정권 추종에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고 적당히 편승해온 재야 선배세대의 기회주의적 행태다. 군사독재정권의 좌경용공 탄압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게 핑계였으나, 진정한 이유는 혹 청년학생들이나 노동자들로부터 비판받을까 두려운 데 있었고, 또 사회주의의 오류나 북한정권의 과오를 제대로 알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는 1980년대 초반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1985년에 쓴 '민주ㆍ통일 민중운동론'과 뒤이어 쓴 '민중시대의 정치와 운동' 등은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고, 민중당 창당은 그 구체적 실천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념논쟁은 기본적으로 사실확인이나 자기확신이 없는 허구에 기초해 있었다. 그래서 이념논쟁에 사로잡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은 비현실적 주장을 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자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드러내는 예를 한두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재야 유명인사에 대한 폄하도 그런 예이거니와, '김대중 무시'에서 갑자기 '김대중 맹신자'로 돌변한 것도 그 예가 될 것이다.

1985년 2월초에 김대중씨가 미국에서 귀국했는데 김대중씨의 귀국을 앞둔 시점에 나는 민청련 간부와 밤을 새며 술을 마신 일이 있다. 그는 나더러 김대중씨를 추종한다며 엄청나게 비난했다. 그 근거로 김대중씨 구명운동과 '김대중ㆍ김영삼 8.15 공동성명' 발표 지원, 그리고 김대중씨 귀국 때의 김포공항 환영 권유 등을 거론했다. 나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전혀 타당하지 않으며, 김대중씨와 관련한 나의 행위는 '김대중 활용론'에서 나온 것일 뿐 '김대중 추종'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나더러 '김대중 추종자'라고 그토록 비난했던 민청련 간부들은 87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비판은 없고 지지만 있는' '비판적 지지'를 내세워 '김대중 맹신자'가 됐는데, 이것은 이념논쟁 내지 CNP논쟁이 허구에 기초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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