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미술 재료가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먹은 3,000년을 살아남았어요. 그만큼 생명력이 있다는 뜻이니 아직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화가 문봉선(49ㆍ홍익대 교수)씨의 개인전 '청산유수'는 먹에도 다양한 색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먹은 단순히 검은색 질료가 아닌 정신이자 역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문씨는 우리의 산과 강, 숲을 찾아다니며 붓으로 스케치를 하고, 여전히 벼루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한국화는 서양화보다 더욱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대지' 연작이 걸린 전시장 1층은 마치 검은 바다 같다. 수평으로 가로지른 검은색 화폭에서 오묘한 물의 흐름이 느껴진다. 검은 화면 위에 몇 가닥의 묵선을 그린 '유수(流水)' 연작은 극도의 절제미로 수양버들의 운치를 표현한 것이다. 한지 위에 검은 빛을 수없이 겹쳐 우거진 숲을 표현한 '대지(녹음)'에서는 마치 서양화 같은 두터운 마티에르가 느껴진다.
2층에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가로 36m의 대작 '대지(임진강)'이 전시장의 세 벽을 두르고 있다. 먹물을 거의 묻히지 않는 갈필(渴筆)법을 이용해 안개 낀 겨울 임진강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그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풍경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모습, 집의 모습까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까슬까슬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부드러운 동양화 붓 대신 탄력있는 서양화 붓을 뾰족하게 다듬어서 사용했다.
분단의 애잔함을 표현하고자 1년 이상 걸려 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문씨는 "내 작업의 새로운 분수령이 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작업인 '안개' 연작을 보면 임진강 그림의 갈필 기법과 비움의 미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씨는 요즘 중국 청대의 동양화 교본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같은 한국화 교본을 만들고 있다. "고교 시절 친구들이 영어, 수학을 공부할 때 저는 '개자원화전'을 교과서처럼 들여다보며 공부했어요. 어딘가에 있을 저 같은 학생을 위한 한국화 교과서를 만들고 싶습니다."
전시는 25일까지. (02)720-5114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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