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컬렉션이 한창이었던 29일 쇼 장에서 겪은 황당한 일 하나. 아직 프런트로(쇼 관람석 맨 앞줄을 뜻한다)가 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 외국인 여성이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좌석에는 참석자들의 소속사 명칭이 적힌 종이표찰이 올려져 있었다. 이 여성 곁으로 행사 진행요원이 붙더니 갑자기 기자 옆의 한 자리 걸러 빈 좌석에 있던 표찰을 냉큼 치우고 그 여성을 자리에 앉혔다. 표찰엔 '00일보'라는 명칭이 선명히 적혀있었다. 쇼 예정시각을 5분쯤 남겨둔 상황이었다.
하루 뒤인 30일 다른 장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유력 패션업계지의 편집장과 기자 등 3명이 쇼 시작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느닷없이 진행요원이 다가와 뒷좌석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황당해진 이들이 "여긴 프레스석인데 왜 옮기라는 것이냐"고 따졌더니 "외국바이어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 시즌 서울컬렉션은 국내 3대 디자이너그룹이 모두 참가하는 통합컬렉션으로 치러진 데다 비즈니스 기회 확대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쇼의 강화, 패션쇼 동영상이 곧바로 아이폰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제공되는 디지털화 등 시스템의 선진화가 돋보였다. 주최측인 서울시와 행사를 주관한 서울패션위크조직위원회의 노력이 많았겠다. 그러나 옥의 티도 있다. 더구나 이 티는 일종의 사대주의 근성처럼 보여 곤혹스럽다.
발단은 서울컬렉션을 어떻게 하든 세계에 알리고, 그래서 우리 브랜드가 글로벌화하는 발판이 되겠다는 진심에서 시작된 것일 터이다. 해외 패션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해외 바이어들이 제품을 주문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올해도 주최측은 100명 남짓의 해외 바이어와 블로거, 패션잡지 기자들을 거금을 들여 초청했다. 서울시는 이들중 일부의 심사를 통해 이번 시즌 서울컬렉션에서 가장 우수한 디자이너 10명을 선정, 해외에 진출시키겠다고 발표했다. 해외 패션인들에게 디자이너 심사권을 준 것이다.
이러다 보니 패션쇼장 마다 이들 해외 초청객과 그들을 수행하는 통역 및안내요원들로 프런트로가 꽉 들어찬다. 국내 패션담당 기자들을 위한 자리는 축소되고 있어도 무시되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20년 가까이 패션계를 출입한 모 언론인은 나몰라라 하면서 외국인이 두리번거리면 진행요원들끼리 서로 자리를 챙겨주느라 진땀을 흘린다. 좌석 문제로 항의하면 주최자와 주관자, 행사진행업체, 참가업체가 서로 떠넘기기에 바빴다.
안나 오르시니 런던패션위크 국제협력국장은 2008년 서울컬렉션에 와서 "디자이너브랜드가 글로벌화하려면 먼저 자국에서 역량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자국 내의 인정과 도움 없이 해외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것은 허망하다는 지적이었다. 서울패션위크가 처한 현실도 다를 바 없다. '외국기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외칠 맘 전혀 없고, 유력 해외 매체에서 서울컬렉션을 다룬 제대로 된 비평을 보는 것은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돈 주고 데려오는 외국 프레스와 바이어에게 목 매는 짓 이제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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