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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길 걷기] <4> 임계 ~ 아우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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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길 걷기] <4> 임계 ~ 아우라지

입력
2010.04.02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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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매여 살지 말라고… 봄 눈은 하얗게 내리고

겨울이 참 길고 길었다. 봄이 다 갈 때까지 눈이 오려는 건지. 태어나 가장 많은 봄눈을 맞았던 것 같다. 아리수길을 찾아 떠난 이날도 눈이 내렸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눈일까. 해발 920m의 삼수령을 지날 때는 잔뜩 쌓인 눈으로 차 바퀴가 헛도는 상황에 부닥뜨렸다. 다행히 제설차를 만났고 그 뒤를 따라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길에서 만난 정선 사람들에게 눈이 참 모질게도 온다 했더니 그분들은 원래 이곳은 눈이 많다며 덤덤해했다. 이곳은 사오월까지 눈이 내리는 게 다반사라고 했다. 산골서 맞는 봄의 눈보라. 이것도 분명 정선의 봄풍경인 것이다.

아리수길 4코스의 시작점은 정선군 임계면 낙천리의 미락숲이다. 석병산 수병산 등에서 흘러나온 임계천과 광동댐에서 나온 골지천이 합수하는 지점에 자리한 숲이다. 수십 년 넘은 느티나무로만 가득한 강변의 운치 있는 숲. 이파리 하나 없는 나목들이 강물의 물안개를 뒤집어쓰고 봄의 꿈을 꾸고 있었다.

미락숲 건너편 바위안을 지나 강길을 따라 걷는다. 길은 포장된 찻길이다. 다니는 차가 별로 없어 한적하게 걸을 수 있다. 옆을 스치는 강물이 짙은 푸른빛이다. 맑고 깊다는 얘기다. 가랭이산에서 뻗어 내린 기암절벽 뼝대 밑으로 강물이 세차게 흘러내린다. 물줄기는 뼝대의 기암병풍과 소나무들이 빚는 선경을 가로질렀고 간혹 암반을 만나선 거친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산을 돌아 S자로 휘어가는 물길을 따라 길도 함께 따라서 돈다. 좌우로 끝없이 이어지는 기암의 풍경은 반천리 구미정에서 절정을 이룬다. 맑은 물과 기암과 울울창창한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풍경 한가운데, 너른 암반이 펼쳐지고 그 위 딱 있을만한 위치에 정자 하나 다소곳이 들어앉았다.

조선 숙종때 공조참의를 지낸 수고당 이자 선생이 정선에 낙향해 머물며 세운 정자다. 구미정이란 이름은 정자 주변에 아홉 가지 절경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정자의 현판에 새겨진 구미(九美)는 첫째 통발을 놓고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잡는 풍광인 어량(魚梁)이고, 둘째는 주변 밭들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전주(田疇), 세째는 편편한 암반을 기리는 반석(般嶼), 네째는 층층의 절벽인 층대(層臺) 등이다.

그렇게 굳이 하나하나를 꿸 필요는 없다. 전체가 하나로 완성된 풍경만 감상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근래에 새로 지어진 정자는 그 자체론 빼어나지 않지만 검박하게 지어진 덕에 다행히 풍경을 흐트려 놓지 않았다.

완벽한 풍경이란 바로 이런 걸 일컫는 게다. 이 그림엔 구색 맞추려 사람을 세워놓을 필요도 없다. 다 부질 없는 일이다. 그 자체로 완벽한 한 컷이 되기 때문이다. 이 황홀한 풍경에서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드라마 '추노'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됐다고 한다. 계속 이어진 뼝대길을 걸으며 한참동안 구미정 풍광의 감흥을 되새김질했다.

구미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전동 마을도 골지천이 품은 비경이다. 반천교를 건너자 마자 왼쪽 옆길로 들어간다. 눈과 얼음이 녹아버린 흙길을 걷는다. 푹신거리는 느낌이 봄의 촉감이다. 옆을 스치는 강물은 더욱 푸르렀다.

낙타 등처럼, 꿈틀거리는 용처럼 생긴 뼝대의 능선이 마을 앞에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있다. 그 뼝대와 이어진 산자락엔 하얀 눈이 쌓여있건만 뼝대의 날카로운 능선에는 눈 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능선이 힘차게 기지개를 펴면서 겨울을 다 털어냈나 보다.

마을 앞은 너른 모래톱이다. 축구장 3, 4개를 합쳐놓은 크기다. 이제껏 아리수길 코스의 물길에서 만난 가장 넓은 모래밭이다. 물줄기는 마을을 지나며 더욱 크게 휘돌아 나간다. 몇 번을 겹쳐 물돌이를 치는 걸까. 물길이 마을을 감쌌고, 또 마을이 물길을 감쌌다.

골지천 물길은 여량 앞에서 또 다른 큰 물줄기를 만난다. 용평리조트 위 도암호에서 흘러내린 송천이다.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바로 아우라지다. 첩첩산중의 정선 땅 중 이곳 여량에서 모처럼 하늘이 넉넉하게 열린다. 일반 평야지역엔 비할 바 못되지만 산골의 경사진 산허리만 부쳐먹던 이들에겐 이곳의 너른 들판이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도 곡식이 남아돈다는 여량(餘糧)이다.

여량은 한때 목재상과 떼꾼들이 득시글댔던 곳이다. 강원 산골에서 베어온 소나무들이 처음 뗏목으로 엮여 한양까지 천리 물길 여행을 시작하는 곳이다. 정선 아리랑의 숱한 애환과 정한이 깃든 곳이다. 합수머리엔 처녀 동상이 하나 서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떨어진 동박은 낙엽이나 쌓이지/사시장철 임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아라리 속의 그 처녀다.

처녀상의 시선이 멈추는 곳에 섶다리가 운치있게 놓여있다. 푹신한 섶다리 위로 걷는다. 출렁이는 리듬에 따라 몸은 저절로 틋窄??읊조린다. 아리수길 4코스의 대미가 완성되는 걸음이다

이성원 기자

■ 여행수첩/ 강원 정선군 아리수길 걷기

● 강원 정선군 임계까지는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IC에서 나와 38번 국도를 타고 태백을 거쳐 들어가는 게 가장 빠르다. 아리수길 걷기 4코스는 정선군 임계면 낙천리 미락숲에서 시작해 바위안-구미정-어전동까지 이어진다.

길이는 약 12km. 천천히 걸어서 4시간 가량 걸린다. 여량 입구에서 아우라지 합수지점의 섶다리까지 강둑과 다리로 이어지는 걸음길도 좋다. 약 1km 길이다.

여량의 옥산장은 유명한 여관이자 음식점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에 옥산장 주인인 전옥매 할머니의 사연이 소개돼 널리 알려졌다. 시간을 잘 맞추면 할머니의 정선아리랑 가락을 들을 수 있다. 식당 옆에는 할머니가 부지런히 수집한 수석들로 채워진 전시장이 있다.

정선의 토속음식재료로 만든 감자옹심이 백숙 시골된장백반 등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다. 주말 점심의 피크시간에는 단체손님이 많으니 피하는 게 좋다.

● 승우여행사는 10, 11일 출발하는 아리수길 걷기(4코스) 참가자를 모집한다. 오전7시30분 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당일로 다녀오는 일정이다. 참가비는 4만5,000원. (02)720-8311

■ 이성원의 여행편지/ 지도 위로 먼저 떠나는 여행길

아리수길 걷기 기획을 시작하면서 처음엔 많이 불안했습니다. 혹시나 그 풍경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나 해서입니다. 다행히 한강의 풍경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한강의 싱싱한 새 물이 석회암의 산을 깎아낸 비경들이 줄줄이 꿴 보석처럼 잇달아 건져 올라옵니다. 왜 진작 이 기획을 서두르지 않았나 무릎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리수길 걷기 취재는 다른 여행 취재와 달리 새로운 코스를 찾는 길입니다. 남들이 만든 코스를 밟는 게 아니라 직접 그 코스를 만든다는 데서 어렵지만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코스를 찾는 첫번째 과정이 지도를 펼치는 것입니다. 새 길을 찾기엔 5만분의 1 지도가 가장 적당하더군요. 좋은 지도엔 임도나 옛길 등 작은 길들도 잘 나와 있습니다. 함께 길을 찾는 승우여행사의 이종승 사장도 틈만 나면 책상에 지도를 펼쳐놓고 마음 속 여행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이 길과 저 길 사이 끊어진 구간은 어떻게 연결시킬까, 이곳에서 물을 건너려는데 혹시 돌다리라도 없을까 하면서요. 그리곤 지도의 등고선으로 그 산세를 짐작하며 그 곳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기암의 절벽은 어떻게 이어졌을지 등을 꿈꾸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소설가 이순원씨도 <은비령> 등 소설을 쓸 때 그 지역을 가보지 않고 오로지 지도만으로 짐작해 풍경을 써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등고선의 휨과 간격만 가지고 산세를 그리고, 안개가 어디로 흘러 들어와 머물지, 그 언덕엔 어떤 빛이 비출지, 저 산봉우리 위론 어떤 별이 떠오를 지를 상상해가며 말입니다. 그가 현장을 먼저 찾지 않았던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글 쓰는 상상이 차단당할까 해서였다고 합니다.

아리수길의 풍경은 결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그려본 풍경을 현장에서 확인했을 때 기대를 뛰어넘는 경치가 펼쳐지면 그 감동은 몇 배로 불어납니다. 현장에선 때로 지도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새로 생긴 다리를 만나 딱 건너고 싶었던 물을 건너기도 하는 행운을 얻기도 합니다.

지도를 펼치고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은 마치 어릴 적 소풍 떠나기 전날 밤의 설렘과 비슷합니다. 비 올 걱정하는 소풍 전날처럼 지도 속 풍경이 생각만큼 안 좋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긴장도 스며있습니다.

오랫동안 지구본을 돌리며 마음속 세계여행을 떠나던 유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도만으로도 흐뭇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여행에선 시작이 반이 아니라 전에 이미 그 반을 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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