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하고 편안한 진행으로 사랑 받다가 어느 날 홀연히 TV를 떠났던 이상벽(63)씨는 알고 보니 사진작가로, 자기계발강사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는 일은 달라졌어도 활기차고 바쁘게 사는 삶의 방식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변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2007년 6월 서울 광화문의 갤러리에서 열린 사진전이다. 처음 연 개인 사진전인데 '내 안의 나무 이야기'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그가 촬영한 나무 사진을 주로 모은 것이다. 지난해 5월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화가 이두식(63)씨와 함께 두 번째 전시회 '이상벽+이두식전'을 열었다.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그는 이제 어엿한 사진작가로 인정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씨는 대학 시절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사진을 부전공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사진과는 원래 인연이 있었다. 그 뒤 방송일 때문에 사진을 멀리했지만 방송을 그만 두고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사진을 다시 찾은 것이다.
진행자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사진이든 뭐든 그를 탐구하자면 역시 방송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신문사 기자로 10년 동안 일하고 방송으로 진출했다. KBS의 '주부가요열창', MBC의 '신혼은 아름다워' 같은 프로를 이끌며 명성을 쌓았으며 특히 KBS의 '아침마당'은 그를 정상에 올려 놓았다. 정은아, 이금희 등 당대의 여성 진행자와 함께 '아침마당'을 이끌면서 방송대상을 수상하는 등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그는 2005년 어느 날 갑자기 방송을 떠났다.
그의 말을 빌자면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읽다가 불현듯 떠날 때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8년 CBS의 '명랑 백일장'을 시작으로 이어온 방송이지만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하는 시를 읽고 방송가를 떠났다. 지난해 가을에는 케이블방송 불교TV의 '붓다야붓다야'를 맡아 방송일 다시 시작했지만 그 전처럼 일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2005년 TV를 그만 둘 당시 그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사진기를 들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디자인을 다시 시작하기는 어려웠지만, 사진은 가능할 것 같았다. 피사체를 잡아낼 수 있는 감성과, 현장을 뛰어다닐 수 있는 건강은 아직 남아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새벽 6시 기상이라는 평소 생활 습관 대로, 그는 방송을 그만 두고도 새벽 일찍 일어나 카메라를 들고 촬영에 나섰다. 나무를 주로 찍었으며 나무 사진을 모아 첫 전시회를 열고 같은 제목의 에세이까지 냈다. 그는 "나무가 우두커니 그냥 서있는 것 같지만 잘 보면 가족처럼, 연인처럼 이야기와 사연이 있다"며 "그것을 사진으로 담는 것은 큰 재미"라고 말했다. 나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 또래 대부분이 그렇듯, 거기에 추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경기 안성에서 성장했는데 어린 시절 학교에 다녀오면 일단 땔감용 나무 한 짐을 산에서 해왔단다. 그것 말고도 나무를 타고 놀았고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먹었으며 나무로 팽이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는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에서부터 최북단인 강원 고성까지 전국을 훑었다. 그 과정에서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는데 잊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충남 태안의 밭에서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한창 촬영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못마땅했는지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더니 그를 알아보고는 세상 이야기나 하자며 손을 잡고 끌었다. 할아버지는 "이금희는 얼굴이 곱고 마음씨도 좋아 보이는데 왜 시집을 가지 않느냐"며 궁금한 것을 하나 둘 물었고 이씨는 한동안 할아버지의 말벗이 됐다.
올해 9월에는 세 번째 개인전을 연다. 주제는 꽈리. 어느 날 소래포구 부근으로 나갔다가 꽈리가 버려진 것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아예 꽈리 모종을 심어 그것이 자라는 과정을 촬영한 것이다. 이렇게 전시회를 꾸준히 여는 데는 역시 사진 애호가인 윤주영(82) 전 문화공보부 장관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윤 전 장관은 "목적의식을 갖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1년에 한 번은 전시회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그에게 이야기 했다.
그가 사진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사진이 예술성, 기록성, 역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너무 사전 같은 이야기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혼자 보기 아까운 것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계기로 친구들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사진을 보면서 촬영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그 또한 사진의 장점이다. "촬영자는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으면 순광의 사진을, 뭔가 개운치 못한 것이 있으면 역광의 사진을 찍게 됩니다."
이렇듯 인생 후반기의 삶 역시 바쁘게 살아가는 그는 인생이모작을 주제로 한 강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어떻게 인생이모작을 할 것인지에 대해 지방자〈報?등의 의뢰를 받아 수년 전부터 자기계발강연을 하고 있는데 요즘도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강연을 한다.
그가 인생이모작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이 50이면 직장을 그만 두는 사람이 속출하는 반면 수명은 길어지기 때문에 퇴직 이후의 삶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인생이모작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데 그 계획이 없으면 직무유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씨는 "사람은 열 가지 이상을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갖고 있는 능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다"며 "일모작에만 집중하느라 이모작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씨는 최근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생산하는 씨케이리더스라는 회사의 운영도 시작했다. 첫 제품이 4월 출시될 예정인데 거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 이상벽이 말하는 사진이 좋은 점
이상벽씨는 사진 촬영을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은 흔히 일이든, 취미든 새로 시작하는 것을 어려워하는데 꼭 그렇게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 가운데는 감수성, 예술성을 갖춘 사람이 많아 나이 들어 늦게 시작하더라도 사진 촬영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씨는 "꼭 잘 찍지 않아도 된다"며 "손자의 발바닥 등 가까운 사람의 모습을 주기적으로 촬영하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여건이 되면 카메라를 들고 야외 촬영에 나설 것을 권한다. 밖으로 나가면 복잡한 현실을 잊을 수 있고 기분이 상쾌한데다 하루에 1만보에서 2만보는 거뜬히 걷기 때문에 기본 신진대사가 활발해 진다는 것이다.
실력을 기르고 싶다면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지닌 필름 카메라가 좋다고 한다. 촬영 하는 순간 좀 더 진지해지고 촬영 후에는 어떤 사진이 나올 지 머릿속으로 상상하게 돼 저절로 실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여유가 되면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문화적인 삶을 사는 것도 사진 촬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는 "나이 들어 세월에 떠밀려 갈 것인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좀 더 즐겁게 살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하기에 달려있다"며 "그래도 여한을 풀고 살고 싶다면 재미 있는 일 하나는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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