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3일 오후 6시 강모(22)씨가 “누군가에게 10시간 넘게 납치 및 강간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성폭력사건 피해자를 위한 원스톱지원센터에서 피해사실을 세세히 진술한 강씨는 다음날 자정께 형사 두 명과 경찰서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씨는 “범인의 집을 안다”고 했고, 형사들은 현장확인차원에서 그곳에 갔다. 강씨는 한 집의 2층을 가리킨 뒤 차에 머물렀다.
형사 한 명이 2층으로 향하던 중 계단을 내려오던 한 사내와 마주쳤다. 형사가 “2층에 사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사내는 “저는 1층 사는데, 화장실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2층은 인기척도 없고 잠겨있었다. 형사는 휘 둘러본 뒤 돌아갔다. 형사가 무심코 스쳐 보낸 사내가 바로 범인이었다. 형사들은 “당시엔 용의자의 얼굴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다음날 구청의 주민등록사진을 통해 범인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이미 그는 잠적한 뒤였다. 수배를 하고 3회에 걸쳐 잠복수사를 했지만 허탕이었다. 한달 뒤 강씨 사건의 범인인 김길태(33)는 끔찍한 살인마로 변했다. 당시 김길태와 마주친 형사가 조금만 치밀했어도 꽃다운 생명이 꺽이지 않았을 것이다.
31일 경찰청이 발표한 ‘부산 여중생 이유리(13)양 납치살해사건’에 대한 자체 합동점검단의 조사결과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강씨 사건 등 이전 관련사건 처리 소홀 등 수많은 실수와 판단착오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여중생 사건의 초기대응도 미흡했다. 2월24일 이양의 어머니가 112에 신고한 뒤 경찰의 판단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지구대는 납치 혹은 실종에 무게를 실은 반면 형사들은 가급적 가출로 보고 싶어했다. 탐문의 결과라고 하지만 서로에게 일을 떠넘기려는 고질적인 관행으로 보인다. 주민 등 30여명이 나섰지만 위로 보고가 되지 않아 대대적인 수색도 이뤄지지 않았다. 가출로 합리화한 터라 빈집 수색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김길태에 대한 제보도 소홀히 했다. 사건 다음날인 2월25일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김길태의 전화, 3월7일 미용실 절도사건도 담당자들의 안이한 판단 때문에 보고가 되지 않았다.
경찰청은 이날 총괄 지휘책임자인 부산경찰청장은 경고, 관할 사상경찰서장과 형사과장은 전보조치, 경감 이하 직원들은 최대 감봉 3개월 등 상응하는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납치 혹은 실종인지, 가출인지를 임의로 판단하지 않고 수사국에서 진단기준을 마련해 적용하겠다”고도 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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