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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10> 4·19 빚 갚기-소설가 박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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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10> 4·19 빚 갚기-소설가 박태순

입력
2010.03.3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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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정오, 서울 광화문

1960년 4월에 나는 만 17년 11개월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신학기가 4월에 시작돼서 4월 2일 토요일 오후 2시에 대학 신입생 입학식이 있었다. 4월 4일 월요일부터 개강이었는데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하였던가, 개강 3주째 되는 4월 18일 월요일에 이미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위에 나섰던 고려대생들이 청계천4가 부근에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음날(4월 19일) 아침의 조간신문들은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9시의 첫 강의는 권중휘 교수의 '19세기 영국 단편소설 강독'이었는데, 9시 30분경 모든 학생들은 교정에 모이라는 통고가 있었다.

1945년의 해방공간 시절에 청년 시위가 자주 일어났다고 하지만 1960년대의 '데모 천국론-데모 망국론'의 양상과 형태는 전혀 다른 쪽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은 언론ㆍ출판의 표현 자유와 함께 집회ㆍ시위ㆍ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었고 사회불복종운동은 불법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교정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종로4가의 전매청 건물 앞쪽에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대열을 정비하여 종로3가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는데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 세례를 담뿍 받았다. 4ㆍ19세대_6ㆍ3세대_3선개헌반대세대를 일명 '최루탄 세대'라고 하였거니와 4월 19일 오전 10시 30분 무렵 '최루탄 전성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눈물세상 선포식이 종로통에서 최초로 거행된 셈이었다.

데모대는 경찰의 저지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다수 학생들이 연행되고 부상당하고 아울러 겁에 질린 도망자들도 생겨났으나 시청을 지나 국회의사당(현재는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대오를 새롭게 정비하게 되었다. 시위대들이 속속 세종로 일대에 집결되고 있었는데 대광고교 학생들이 갈채를 받았고 한강다리를 건너온 중앙대생들이 의기충천이었고 서울대 의대생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당도했었다. 세종로가 바다가 되었다고 읊었던 이도 있었지만, 광화문 일대의 권력공간이 이날 정오 무렵 거대 시민광장으로 새롭게 탄생되고 있었던 것이야말로 역사적인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적 체험의 공유화와 사유화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1995년 철거) 앞에서 시위대들은 다시 엄청나게 눈물을 흘려야 했는데 최루탄 폭풍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전차 노선의 효자동 종점은 바로 경무대 정문 입구 쪽 길목에 있었는데 오후 1시 10분 무렵 시위대가 거기까지 당도했다. 서울 일원에 이날 오후 1시를 기하여 경비계엄령이 발동되었다는 것을 시위대들은 알 턱이 없었다.

1시 20분 무렵의 첫 발포는 공포탄 발사였으나 두 번째부터는 실탄 발사였다. 경무대 앞에서 순식간에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게 되어 이날 하루 동안에 183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경무대 앞에서 우연히도 나는 총에 맞지 않았으나 나의 친구 박동훈(당시 서울법대 신입생)은 그렇지 못하였다. 우리는 고교 시절에 독서회 서클을 만들어 헤르만 헤세 유형의 성장통을 함께 나눠온 사이였다. 우리는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쳤던 것이었는데 잠시 뒤에 나는 그가 총에 맞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신문사의 취재차량 지프차가 다급하게 병원으로 운송하려고 그를 태우는 것을 목격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당시에는 4월 19일을 '피의 화요일'이라 불렀고,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문구가 유행어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4월 21일 망우리 공동묘소에서 '민주열사'라는 만장을 앞세운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을 적에 어찌하여 나의 친구가 '열사'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역사적 현실로 표변되어 역사로부터 돌연한 호출과 호명을 받게 되는 상황…, 그리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대번에 껴안게 하는 '역사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역사적 사건의 공유화와 사유화를 통해서 과연 '4ㆍ19의 성격'은 어떻게 규명되고 있었던지, 기성세대가 설명해주는 방식과 내가 실제로 겪었던 관찰이 서로 어긋나기도 했다.

당시에는 통상적으로 '4ㆍ19 학생의거'라 했다. 4ㆍ19가 그처럼 학생들의 올바름 추구의 거사에 그치는 것이었다면 이는 근대 시민혁명의 차원과 단계에 이르지 못한 역사운동이라는 평가절하가 된다. 그런가 하면 군정 당국은 1963년 10월 15일의 제5대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그 해 9월 20일 '수유리 4ㆍ19묘지' 준공식 및 기념탑 제막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기묘한 득표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4ㆍ19묘역 조성에 찬성하지 아니한 유가족들은 연행되어 곤욕을 치러야 했고 강압적으로 이장을 해야 했는데 역사 환경은 얼마든지 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군부세력은 민정 이양을 앞두고 자발적으로 민주 성역공간을 장만해주게 하였던 것이었으니 외려 근대의 입구와 출구를 그 역사전망대에서 항상 새롭게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근대의 강제편입과 근대의 명예졸업

'386세대'란 조어는 90년대 초에 나온 것이었는데 엉뚱하게 제출된 시사용어라 아니할 수 없다. 186, 286 컴퓨터에 이어 386컴퓨터는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으나 펜티엄이라 하던 586컴퓨터의 등장으로 '386'은 도무지 맥을 쓰지 못하게 된 것에 비유되어 생성된 용어였다. 90년대 초에 이미 30대가 돼버렸으나 80년대에는 짱짱한 운동권 청춘이었으며 출생의 연도는 60년대에 속하였던 그러한 세대이노라 하는 주장이었다. 60년대-70년대-80년대의 30년을 한 세대로 획정해본다면 4ㆍ19세대와는 다른 형태와 양상으로 386세대는 특이한 연대기의 역사체험을 축적시켜 온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한국학생운동 통사의 잣대로서 고찰하는 정교한 분석담론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싶다. 나로서는 1960년의 4ㆍ19에서 1987년의 6월항쟁과 1990년대의 '절차 민주주의'의 행진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일관성을 지녀온 청년문화운동을 '근대와의 30년 전쟁'이라고 정의해보았던 적이 있다.

'근대'는 바깥으로부터 들어온 것이었지만 '근대성'과 '근대화'를 구분지어 살펴야 한다. 근대성(moderinty)은 우리가 인권보장을 받는 인간해방의 근대인으로 되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위로부터 전개시켜나간 근대화(modernization)는 근대성을 무시하고 어떤 면에서는 압류시켰던 '반(反)근대성의 근대화'라 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한국사회는 4ㆍ19를 기점으로 하여 사회 내부와 아래쪽으로부터의 근대운동 실천의 역사를 축적해오게 되었던 것이고 그리하여 '옆으로부터의 근대' 또한 실행해 나갔을 것이다.

근대성과 근대화의 정당한 합류를 통해서만 우리는 (왜곡되었던) 근대의 입구로부터 (정상적인) 근대의 출구로 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사회는 후근대와 탈근대의 명제를 어찌 인식하고 있는 중일까. 후근대의 산업기술문명에서 탈근대의 정보지식문명으로 진입해야 하는 것에 대해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그리고 지식권력이 어찌 가늠해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산업세력이니 민주세력이니 하는 따위의 편 가르기 키워드의 관찰은 이제 걷어치울 때가 되었다.

한국 근대문학의 성취가 과연 어떠하였던지 심각하게 자문해보게 되는 것 또한 후근대문학-탈근대문학의 진로가 불확실성의 연속인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나로서는 '4ㆍ19 빚 갚기 문학'의 명제 앞에서 송구스럽기 그지없는데 다만 나에게 짐 지워진 근대문학의 몫을 어찌 갈무리해볼 수 있을지 그 의무와 권리마저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식민 극복의 3ㆍ1절과 8ㆍ15 광복절의 국가기념일을 갖고 있지만 제헌절은 공휴일에서 해제되어 해방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념일은 갖지 못하고 있다. 4ㆍ19의 반백년 맞이, 5ㆍ18 민중항쟁 30년 맞이, 그리고 87년 6월항쟁 13년 맞이에 즈음하여 4ㆍ19, 5ㆍ18, 6ㆍ29의 어느 날이라도 좋으니 '시민운동 기념 공휴일'을 마련해보아야 하리라고 끝으로 제언한다.

약력

▦1942년 황해도 신천 출생 ▦1964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64년 '사상계' 통해 등단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 ▦소설 <무너진 극장> <정든 땅 언덕 위> <신생>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밤길의 사람들> 등, 산문집 <작가기행> <국토와 민중> <나의 국토 나의 산하> 등 ▦한국일보문학상, 요산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 단재상 등 수상 ▦현 국토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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