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포석계곡 끝자락에 사적 제1호인 포석정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 포석정은 신라 1,00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아픈 사연을 간직한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잘 남아있다.
신라 제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잡혀 자결하고 왕비를 비롯한 여러 궁녀들은 그들 침략자의 노리개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세움으로써 신라는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우리는 지금도 포석정이 패배의 치욕적인 역사현장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포석정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연유로 마련되었으며 그 주된 용도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포석정 터에 남아있는 포석은 다듬은 화강석 돌을 사용하여 물이 흘러가도록 한 구조인데, 전체적인 형태가 마치 바다의 전복 껍질둘레와 같은 모습을 담고 있다고 조선 시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전체가 구불구불하여 물이 흘러가면서 속도가 완만해지도록 돼 있다. 그 특이한 형태의 시설은 세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신라인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적이라고 한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상곡수연은 서기 353년 3월3일 중국의 절강성 회계산 북쪽에 란정(蘭亭)이란 정자에 당시 명필로 유명한 황희지 등 명사 41인이 모여 개울물에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한 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신의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당시 읊었던 시를 모아 묶으면서 서문을 왕희지가 썼는데 그것이 유명한 蘭亭會記(난정회기)의 蘭亭集序文(난정집머리말)으로 알려져 있다.
이 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포석정과 같은 시설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유배거(流盃渠)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중국의 유배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라특유의 독창적인 시설을 마련한 것이 포석정이라고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포석정은 결국 귀족층의 놀이시설로 마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보아야 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98년 5월 포석정 지역에서 砲石(포석)이라고 새겨진 신라기와편이 출토되어 이를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포석사(鮑石詞) 즉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즉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한 성스럽고도 경건한 장소였다는 해석이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군신들을 포석정에 군신들을 불러놓고 왕이 술 마시고 즐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나라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 참변을 당했다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지닌다. 경애왕이 잔치를 베풀고 놀이에 빠져 결국 신라가 패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재해석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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