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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9>소록도와 여수 애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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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9>소록도와 여수 애양원

입력
2010.03.2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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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센인 강제노역으로 세운 '종신감옥'엔 일제의 폭압 흔적…

전남 고흥반도를 향해 당장이라도 껑충 뛰어나갈 듯한 어린 사슴 모양의 소록도. 이 작고 아름다운 섬은 한센인이라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일제 식민권력의 차별과 배제, 감시와 처벌이라는 쓰라린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일제 당시 국립 소록도갱생원은 해방 후 국립 소록도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소록도와 고흥 녹동항을 잇는 연륙교인 소록대교가 개통(2009년 3월)되기 전까지 이 섬에는 근 한 세기 가량 한센인들에 대한 '절대 격리'를 내세운 식민권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소록도 근현대사의 기점은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이 풍부하며 육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한센인 수용지로 결정한 1915년이다. 이듬해 섬 서쪽의 야트막한 언덕 주변에 병원 건물인 자혜의원과 환자들의 숙소가 세워지고 조선 각도에서 한센인들이 실려오면서 규모가 점차 커졌다.

소록도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해는 경기도 위생과장이던 수호 마사키(周防正季)가 제4대 소록도 갱생원장으로 부임한 1933년. 수호는 소록도를 소재로 한 소설가 고 이청준의 장편 <당신들의 천국> 에 등장하는 권력욕에 불타는 주정수 원장의 실제 모델이다. 의사였지만 건축, 설계, 조경에도 관심이 많았던 수호는 취임과 함께 소록도를 "세계 제1의 한센병 요양소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소록도갱생원은 3차례의 대대적 확장공사가 진행되면서 환자숙소, 일주도로, 납골당, 선창, 학교, 아동수용소, 형무소 등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이때 세워졌다. 1916년 100여명이었던 소록도의 한센인 환자는 1940년 무렵 6,000명을 넘어서게 된다.

무엇보다 소록도를 찾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소는 섬 중앙부, 현재 국립소록도병원 남쪽 동산에 자리잡은 2만㎡ (약 6,000평) 규모의 중앙공원이다. 삼나무, 팽나무, 종려나무, 팔손이나무 등 잘 손질된 100여종의 관상수와 완도, 금당도 같은 인근 섬들뿐 아니라 일본, 대만 등지에서 가져온 정원석들이 어울려 이국적 분위기를 풍긴다. 중앙공원을 비롯한 이 시기의 소록도 역사(役事)들은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어린 강제노동으로 이뤄졌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38년 소록도에 왔다는 김기현(89)씨는 "일주도로를 닦을 때는 새벽 4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는데 하루 배식은 입으로 후 불면 날아가는 납작보리쌀 두 홉(360g)이 고작이었다"며 "금테 모자를 쓴 일본인 사무장은 야구배트 같은 몽둥이를 들고 우리를 감시하곤 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수호 원장은 중앙공원 정상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그 앞을 지나다니는 한센인들로 하여금 절을 하도록 했다. 그는 부임 9년 만인 1942년 자신의 이 동상 앞에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는 환자 이춘상의 칼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

중앙공원 서편으로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악명높은 감금실이 자리하고 있다. 두 개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돼 있고 건물에는 각각 5~8개의 방이 있다. 좁은 방은 몸을 간신히 눕힐 수 있을 정도다. 물건을 훔치거나 직원을 폭행하거나 신사 참배를 거부할 경우 감금실에 갇혔는데 그 중 가장 중한 사유는 도주였다.

경북 청송 출신으로 1941년 소록도에 온 장기진(89)씨는 "일은 지독하게 시키는데 배는 고프고 치료약도 제때 주지 않아 야음을 틈타 녹동으로 헤엄쳐 도망가려다 물에 빠져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장씨는 "나중에는 아예 녹동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도주자를 잡아와 감금실에 가두곤 했다"며 "그곳에서 얼어죽는 사람도 숱했다"고 증언했다.

일제의 한센병 정책의 본질은 한센인의 사회적 격리가 아니라 '절멸'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도 남아있다. 감금실에서 풀려난 한센인들은 검시실 옆 수술대에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감시실 수감자뿐 아니라 결혼을 하려는 한센인 남성은 모두 정관수술을, 여성은 불임수술을 당했다.

수술대 옆 벽에 감금실에 갇혔다가 정관수술을 받은 한센인의 시가 걸려 있다. 지은이의 이름은 이동이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소록도가 일제의 전체주의적 구료정책의 실상을 드러내는 곳이라면 여수 애양원은 서구 선교사들의 한센인 정책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곳이다. 애양원은 미국인 선교사 포사이트가 1909년 세운 광주나병원을 계승한 한센인 요양병원으로, 1926년 이전해 현 위치인 여수공항 동쪽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터를 잡았다.

강제수용 방식의 소록도와 달리 여수 애양원과 대구 애락원 등 서구 선교사들이 세운 요양시설은 한센인들이 자발적으로 입소하고 자발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인격적인 처우를 한 탓에 선교사들은 이곳에 입소하려는 한센인들의 입원 압력에 내내 시달렸다고 한다.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애양원과 애양교회를 중심으로 환자들의 거주지가 동심원으로 산재해 있는데 이는 이곳이 신앙공동체로 운영됐음을 보여준다. 1934년에는 이 같은 운영에 불만을 품은 반교회 신자들이 애양교회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배병심 애양원 역사박물관장은 "1941~45년 일본인들이 잠시 운영할 때를 빼고 이곳에서는 불신자들에 대한 치리(교리에 불복한 이에 대한 책벌)가 있었다"며 "그러나 애양원은 환자들이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소록도와 달리 자발적으로 노동하고 자급자족하는 요양공동체로, 일제의 한센인 정책이 얼마나 폭압적이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고흥ㆍ여수=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이세용 이춘상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춘상 선생은 한센인들도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올바른 사리판단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세용(64ㆍ사진) 이춘상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한센인들의 인권을 탄압하고 황제처럼 군림했던 수호 마사키 제4대 소록도갱생원장을 살해한 이춘상의 행위는 민족의 의거로 기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춘상 선생 '의거' 60주년이던 2003년부터 매년 두 차례 의거일(6월 20일)과 사형집행일(2월19일)에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고 밝혔다. 2003년에는 국가보훈처에 이춘상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는 신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보훈처는 이춘상의 행위가 '독립운동적 성격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신청을 기각했다.

"사건이 발생한 뒤 일본의 한센병 관련 잡지는 '조선 제1 흉악범은 이등 공(이토 히로부미)을 살해한 안중근이고 제2의 흉악범은 이춘상'이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일본도 이춘상 선생의 의거를 민족운동 차원에서 봤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당국은 계속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고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현재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한센인을 돕는 대학생 봉사동아리들을 교육하고 있는 이씨가 이춘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센병 치료를 위해 10년간 머물렀던 자신의 소록도 체험이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한센인들이 국가로부터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라는 의식과 함께, 국가의 세금만 축내고 있다는 식의 자괴감에 시달리는 데 주목하게 됐다고 한다. 이씨는 한센인들 스스로 '우리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음가짐을 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춘상 재평가야말로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씨는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센인들의 관심이 높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행사를 할 때마다 소록도로 편지를 보내지만 참여하는 분이 거의 없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춘상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도록 하는 데 한센인들부터 앞장섰으면 합니다."

이왕구기자

■ 일제, 선교사들 영향력 견제하려 수용소 건립

한국에서 근대적 한센병의 역사는 사회적 차별과 격리, 이를 둘러싼 서구 선교사들과 조선총독부의 경쟁, 협조, 갈등이 뒤얽힌 복잡한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한반도의 남쪽 섬인 소록도에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100명을 수용하는 한센병 수용시설을 설립했다.

1907년부터 1911년 사이에 부산과 광주, 그리고 대구에 선교사들이 세운 '나요양소'들이 조선인 병자들에게 인심을 얻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소록도는 당시의 무단통치 방식에 따라 일본식 생활을 강요하여 수용자의 사망률이 20%를 넘었다. 3ㆍ1운동과 이에 따른 이른바 문화통치 전략은 한센병자들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윌슨, 맥켄지, 플레처 등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시설들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커지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지원금을 통해 이들을 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록도병원의 관리를 유화적인 방식으로 바꾸면서 수용규모도 조금씩 늘려 갔다.

조선총독부의 한센병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31년 만주 침략부터다. 일본에서 나예방법이 제정되고, 이를 근거로 하여 절대격리 정책과 국립요양소 제도가 실시된 후, 조선에도 이런 방침을 적용하였다. 조선나예방령을 제정하여 강제격리를 하면서 소록도를 '국립' 시설로 만들었다. 일반 사회로부터의 차별과 절대적 격리정책은 함께 강화되었다.

소록도 갱생원은 3차례에 걸쳐 확장되어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규모 수용시설이 되었지만, 동시에 환자들의 강제노동, 감금, 생체실험, 단종 등이 횡행하고 신앙의 자유도 박탈된 일종의 종신 감옥이 되었다. 상대적 격리를 원리로 하는 선교사들의 '사립' 요양소 중 부산의 상애원은 1940년에 이르러 군사적 이유로 폐쇄되었고, 대구와 여수의 원장들은 축출되었다.

절대격리체제 하에서 한센병자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성원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인간됨 자체를 부정당하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가사 상태에 놓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소록도에서의 혹독한 억압과 차별, 그리고 개인숭배는 상상을 초월했다. 1942년 이춘상이라는 환자는 소록도의 참상을 원장 살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고발했다.

최근 뜻있는 변호사들의 노력으로 일제하에서 소록도에 수용된 적이 있는 노년의 환자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수용의 피해자로 인정되어 보상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일제의 차별과 억압을 고발하고 일본인 원장을 응징한 이춘상은 사형당한 지 70년이 가깝도록 명예회복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살인자'로 남아 있다. 식민지 지배당국이 만들어낸 '한센병자들은 인간이 아니다'는 믿음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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