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교 공과대학에 갔다. 근사한 건물에 연구기자재나 시설들도 전문연구소에 뒤지지 않게 잘 갖춰져 있었다. 로비며 휴게실도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건물 곳곳의 여자화장실이었다. 대학 입학하고 얼마 안돼 열린 체육대회 때 화장실에 가고 싶어 가까운 공대 건물로 들어갔다가, 1층부터 6층까지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매고도 여자 화장실을 찾지 못해 애먹은 기억이 떠올랐다.
나중에 공대 건물에는 딱 한 칸의 여자 화장실, 그것도 교수화장실이라고 표시된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여자는 공대가면 취직도 안되고 시집도 못 간다"고 말리는 바람에 희망했던 공대 대신 물리학과로 진학했던 나는 선생님의 걱정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공대에 진학했더라면 지금과 비슷한 위치에 올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해보면 그 답은 "어렵다"이다.
지금의 대학은 많이 달라졌다. 특히 여학생의 양적인 변화는 두드러진다.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이 남학생을 처음으로 추월했고, 2000년 이후 4년제 대학 자연계 여학생 비율이 53% 이하로 내려온 적이 없으며, 공학계도 18~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여학생이 남자들과 똑같은 이공계 교육을 받고 우수한 능력을 갖춰 졸업하고 있다.
하지만 졸업 후의 상황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지난해 전국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이공계 전공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0~70%선으로 90% 이상을 유지하는 남성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정규직만 놓고 보면 더 심각해서, 연구기관의 정규직 여성은 10%에 불과한 반면 비정규직은 41%에 달하는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특히 20대에서는 크지 않던 남녀 경제활동 참가율 격차가 30대가 되면 95% 대 57%로 현격하게 벌어지고, 이 격차는 60세까지도 회복되지 않는다.
이공계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문제는 여성 개인이 아닌 국가경쟁력 차원의
문제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고 미래에 희망을 갖는 이유는 우수한 인적자원 때문이다.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 이공계 진학기피 등에 따른 이공계 인력수급 문제의 첫 번째 해법도 여성인력 활용을 촉진하는 것이다. 지난해 OECD 보고서에도 주요 정책 권고사항 10개 중에'과학 및 공학분야 여성참여율 향상'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에서도 중요성을 인정해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여성과학기술인 활용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나 채용할당제 시행 등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제는 진입을 도와주는 단계를 지나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보육프로그램 지원 등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용단절을 줄여야 한다. 고용 상태나 승진 등에서 양성평등이 보장되도록 강력하게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남성 중심의 근무환경과 제도도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아내와 내 딸을 위한 일이고,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일이므로 기분 좋게 동참하고 응원하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여학생 비율이 다른 대학에 비해 자꾸 높아지니 동문들의 활동에 따라 좌우되는 대학 평판이 떨어질까 봐 걱정"이라는 교수님의 고민이 없어지고,'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정책이 필요 없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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