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초부터 한국사회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노동자계급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었고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도 도처에서 나타났다. 저항도 치열했지만 탄압 또한 강경했다. 다만 구속하는 일이 거의 없었을 뿐이다. 특히 1984년 하반기 들어서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해졌다. 청계노조의 '9.19투쟁'과 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은 그 표본이었다.
나는 학생과 노동자의 투쟁을 격려하거나 이들의 연행과 폭행에 항의하러 다니는 일로 바빴는데, 이런 일로 나 자신이 폭행을 당하거나 경찰에 연행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구속이 자제되면서 주로 구류를 살았는데, 걸핏하면 구류를 살아 몇 번이나 살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가택연금이 많았다. 유명인사의 집 앞에는 초소를 지어놓고 24시간 감시했다. 나의 경우 이소선어머니와 이웃해 살았기 때문에 북부경찰서는 두 집이 잘 보이는 곳에 초소를 지어놓고 감시했다. 그러면서 집회나 시위가 있을 만한 날에는 전경을 동원해 외출을 차단했다. 그래서 중요한 집회가 있는 날에는 2,3일 전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몸싸움을 벌여 기어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나는 당연히 많은 일에 관여했는데, 여기서는 청계노조투쟁과 '박종만 사건'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나는 무슨 활동을 하든지 청계노조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이소선어머니나 청계노조 간부들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청계노조를 '전략단위'로 간주한 때문이었다. 즉 청계노조는 사업장 내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역할에나 머무는 게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서울 한복판에 2만여 명의 노동자가 집결해 있는 평화시장을 기반한 데다 '전태일'이란 상징성을 통해 전체운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특히 노학연대투쟁을 조직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70년대에도 80년대에도 청계노조 활동에 깊이 관여해서 민주화운동을 선도할 뿐만 아니라 노학연대투쟁이 전개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태일은 누구인가', '인간시장', '청계노조의 합법성에 관한 법률적 검토' 등을 쓴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1984년 5월 1일의 '청계노조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에도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거니와, 그 해 9월 19일의 '9.19투쟁'은 5.17쿠데타 이후 학생과 노동자 3,000여 명이 서울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인 최초의 투쟁이자 노학연대투쟁의 전형이었다. 이 투쟁은 곧 이어 전개된 '10.12투쟁'과 함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재야민주화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도 민주화투쟁이 소강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청계노조가 4월 12일 서울 왕십리 일대에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전체 민주화투쟁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청계노조가 이처럼 노학연대투쟁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은 것은 청계노조 간부들의 역할도 컸지만, 그 이전에 제일교회, 형제교회, 경동교회 등에서의 야학과 더불어 많은 소그룹에서의 노동자와 학생의 공동학습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일상적 활동들이 정세에 맞는 올바른 투쟁전략에 따라 수렴되게 하는 일인데, 나는 이 역할을 상당히 했던 것이다.
청계노조와 관련해 몇 마디 덧붙이면, 청계노조가 민주노동운동의 산실로, 민주화운동의 견인차로 역할하는 데는 청계노조 조합원들의 생명을 건 투쟁이 있었다. 이소선어머니를 비롯해서 전태일의 친구들, 그리고 젊은 조합간부들 가운데 한두 번 이상 죽음을 각오하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9.19투쟁' 때는 50m도 넘는 청계고가도로에서 밧줄에 매달려 언제 떨어질지 몰랐고, '10.12 투쟁'과 '4.12 투쟁'에서는 최루탄 '폭탄'으로 생사가 오락가락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4년 11월 30일에는 민경택시 노조위원장 박종만이 '나 한사람 죽으면 무언가 달라지겠지'라는 유언을 남기고 분신자결한 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이 안치된 세브란스병원 영안실로 갔더니 회사측 택시기사들이 빈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족을 설득해 민주세력이 장례를 주도할 수 있게 됐으나 경찰이 우리를 포위하고는 영안실에서 끌어내려 했다. 격렬한 몸싸움으로 새벽까지 버텼으나 날이 새자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 닭장차에 실었다.
연행과정에 난투극이 벌어져 닭장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자 경찰이 차 안에 사과탄을 터뜨려놓고는 차 문을 잠가버렸다. 코밑에서 사과탄이 터지는데 순간 지옥이 이런 곳인가 싶었다. 질식할 것만 같아 운전석 옆 유리창을 발로 힘껏 찼더니 유리가 깨지면서 최루가스가 창문 밖으로 뿜어져 나갔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불이 난 줄 알고 '불이야' 하고 고함을 질러 경찰이 차 문을 열어주었으나 이미 우리는 차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했다. 특히 김문수, 권형택, 신광용의 실신이 심했다. 한 사람씩 끌려나와 서리가 하얗게 내린 잔디 위에 한참 누워 있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도 구류를 살게 됐는데, 나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살인적 폭력을 지휘한 마포경찰서장의 파면을 요구하여 열흘 넘게 단식투쟁을 했으나 결국 마포경찰서장이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지금 생각하면 한때의 스릴 넘치는 추억이기도 하나 그때는 매 순간 생명을 건 투쟁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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