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치하에서도 양심과 윤리를 고수, 핵무기 개발에 '나태'했던 훌륭한 학자다."(독일측 주장) "핵무기 개발을 열망했으나 현실적으로 뒷받침이 안 돼 독일이 실패하자, 책임을 벗어나려는 기회주의적 과학자다."(미국측 주장)
나치 치하의 독일 과학자 하이젠베르크를 두고 독일과 미국 양측의 과학사학자들이 보였던 극명한 대립이다. 극단 청맥이 25일부터 무대에 올린 '코펜하겐'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진실 게임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핵분열, 원자탄 제조과정,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 등 현대 물리학의 초석이 되는 이론들이 마치 일상 대화처럼 풀려나온다. 자연과학과 윤리의 문제로 홍역을 치른 우리로서는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각각 독일인(하이젠베르크), 유대인(보어)으로서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극적인 운명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현대사의 고민으로 연결된다. 1941년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파죽지세이던 독일의 핵분열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사령탑에 올랐고, 보어는 피점령지의 유대인일 뿐이었다. 실제 무대는 당시 물리학의 메카로 통하던 코펜하겐.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찾아간 그곳을 모티프로 삼는다.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다. 세계 물리학의 본산이었으나 독일의 적국이었던 덴마크의코펜하겐은 현대의 비극을 암시한다. 수많은 독백과 대화는 암시적이고 불확정적이다. 이 과학자들의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장치가 보어의 부인 마거리트다. 소소한 일상을 통해 대과학자 남편의 숨겨진 진실을 발겨내는 그녀의 존재는 일상의 힘을 대변한다. 원작자 마이클 프레인은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기묘하다"며 "원자 세계에서의 불확실성처럼 인간 행동의 동기에도 다층성과 비예측성이 공존한다는 점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1998년 영국서 초연된 이 작품은 2000년 토니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30여개 언어로 무대에 올려지는 등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견 연기자 남명렬을 비롯해 김태훈, 조경숙 등이 출연한다. 윤우영 연출. 4월 11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02)3668-0029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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