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짓 것 다 때려치우고 고향 내려가서 농사나 지으련다. 우리 식구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겠지.'
직장에서 더럽고 치사하다 느낄 때, 돈도 안 모아지고 몸만 축날 때, 언제까지 자리보존 할 수 있을까 불안할 때, 흔히 이렇게들 생각한다. 하지만 귀농(歸農) 얕잡아봤다간 큰 코 다친다. 취미로라면 모르지만 귀농으로 입에 '풀칠' 하려면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더 나아가 농촌에서 새 인생을 살고 싶다면 아예 딴 사람이 돼야 한다.
"농산물 아니라 가치를 팝니다"
인생 2막으로 귀농을 고려하는 직장인이 많다고 하자 박화춘(47) 다산육종 대표는 정색하고 이렇게 못 박았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 귀농인이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가산리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다산육종 농장에서 기르는 흑돼지는 현재 1만400여 마리. 982평으로 시작한 돈사가 지금은 3,700평에 이른다. 많을 땐 연 매출 약 55억원, 순익 약 10억원까지 기록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농업을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인식으론 자유무역협정(FTA) 경쟁력은커녕 먹고 살기도 힘들죠. 그저 공기 좋은 농촌에서 지내려는 게 아니라 농업으로 돈을 벌 생각이면 농산물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팔아야 합니다."
박 대표가 파는 가치는 돼지고기의 고급화다. 남원 흑돼지는 예부터 '똥돼지'라 불리며 맛 좋기로 소문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시장규모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몇몇 농가에서 수백 마리씩 키워 겨우 먹고 살 정도 수익을 올리는 게 다였다.
박 대표는 원산지가 영국인 버크셔 흑돼지를 고기가 지방이 적당히 끼면서 촉촉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도록 개량했다. 이 종을 2006년 '박화춘 박사의 지리산 흑돈'으로 상표등록 하고 유통업자들을 설득해 다른 돼지고기보다 2배 정도 비싸게 팔았다. 직거래 식당은 주인을 설득해 인테리어까지 바꾸게 했다. 허름한 삼겹살집처럼 떠들썩한 분위기가 아니라 칸막이를 쳐 가족만의 공간을 만들고, 입소문이 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 식당은 흑돈 국밥이라는 신메뉴까지 개발하면서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처음엔 될까 안 될까 노심초사했죠. 그래도 꼭 '프라이드 농업'을 하고 싶었어요. 고급 소비층을 겨냥해 지역 흑돈 산업화를 내가 끌고 가겠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말이죠."
고향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
이런 마음을 먹은 이유는 남원이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박 대표가 내려온다는 게 처음 알려졌을 때 고향의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어릴 적 모범생 소리 들으며 자라 서울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돼지 키우러 온다니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죠. 정치에 뜻이 있는 거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했어요."
마을 한쪽엔 '경축, 어느 중학교 출신 누구 공학박사 취득'이란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다. 박사가 나오면 마을 전체 경사로 여기는 곳에서 축산업에 섣불리 손댔다 실패하면 아무리 고향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기 어려울 터였다. 그는 지인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부터 바꾸도록 유도했다.
"동네 분들은 절 박 박사라고 부릅니다. 형, 동생하며 편하게 지내다 보면 나태해질 것 같았어요. 회사 대표가 된 뒤엔 사적인 행사 지원은 가능한 피하죠. 고향일수록 처신을 잘 해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어요."
농장이 좋은 직장, 좋은 기업이 돼야 한다는 게 박 대표의 신념이다. 그는 이를 '사장(CEO)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야 농업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나 귀농인이 많아지고, 더 나은 농산물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꼼꼼히 준비
박사학위를 받고 3년간 몸 담은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을 떠나던 1996년. 이미 박 대표는 막연하게나마 기업형 농장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농협중앙회로 직장을 옮긴 뒤 여러 갈등을 겪는 동안 꿈을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은 점점 확고해졌다. 농장을 경영하려면 현장부터 알아야 했다.
"가축 육종을 담당한 연구원이 농가 민원처리에 발 벗고 나섰죠. 축산 관련된 설비 구입부터 행정 절차까지 농촌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실제로 경험했어요."
그렇게 꼼꼼히 준비한 뒤 2000년 6월 드디어 고향에 농장을 지었다. 이듬해 사표를 냈는데, 1년만 더 도와달라는 상사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다. 형에게 잠시 농장을 맡겼다가 2003년 새해 첫날 가족과 함께 귀향했다. 다산육종을 포함한 이 지역 16개 농가는 2008년 농림수산식품부 '친환경흑돈클러스터' 사업에 선정됐다. 올해까지 52억여원의 지원을 받으며 흑돼지 사육과 유통 규모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 박화춘 대표의 또 다른 도전 '발효생햄'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돼지고기 부위는 삼겹살이다. 그러?돼지 한 마리에서 삼겹살은 25% 정도다. 나머지 비선호 부위는 가격도 3, 4배나 낮다.
박화춘 다산육종 대표는 대표적 비선호 부위인 뒷다리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고안하고 있다. '발효생햄'이다. 유럽에서 2,000년 전부터 먹어온 이 전통 육제품은 뒷다리를 통째로 소금에 절여 9∼12개월 동안 그늘진 곳에서 자연 발효시켜 만든다. 스페인의 하몽과 이탈리아 파르마, 중국 금화햄, 미국 컨추리햄 같은 발효생햄은 최고급으로 친다. 일부 수입업체를 통해 들어온 발효생햄이 최근 국내에서도 복분자주 머루주 같은 전통발효주나 와인 안주로, 빵이나 과일과 함께 먹는 간식으로 소비가 늘고 있다.
박 대표는 "백돼지보다 흑돼지로 발효생햄을 만들면 훨씬 맛이 좋다"며 "국내에서도 소비자 인식만 바꾸면 잘 팔릴 것"이라고 말했다. 최고의 맛을 위한 기술 확보가 우선. 국립축산과학원의 기술지도를 받아 연구를 마치는 대로 올해 안에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남원=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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