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호기심 때문이었어요.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어요.”
D증권사 투자상담사 이모(35)씨는 25일 뒤늦은 후회를 했다. 최근 2년간 200억원이 넘는 거래로 투자자의 돈을 불려주고, 자신도 억대 수익을 냈을 정도로 잘 나가던 그의 실력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었다. 남의 능력을 몰래 훔쳐 이룬 모래성이었다.
그에겐 미치도록 따라잡고 싶은 동료가 있었다. 2001년부터 2003년 6월까지 서울의 한 증권전문가 양성 사설기관에서 강사 겸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정모(38)씨다. 평범한 투자자에 불과했던 이씨와 달리 정씨는 2006년부터 모 증권사 주식 수익률대회에서 수 차례 1등을 할 정도로 군계일학인 재야고수였다.
이씨는 문득 같이 일할 당시 정씨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서 알려준 정씨의 K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 계정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어뒀던 걸 떠올렸다. 그저 어떤 종목을 샀는지가 궁금했던 이씨는 정씨의 아이디로 접속해 거래종목을 확인했다. 공인인증도 필요 없고, 로그인 상태에서 다른 컴퓨터로 로그인하면 자동 로그아웃 되는 ‘이중로그인’ 방지기능도 없던 터라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그리고 주식거래시간 내내 들여다보며 투자도 따라 했다. 돈을 벌기 시작했고 이름도 알려졌다. 덕분에 이씨는 2008년 8월 D증권에 계약직 투자상담사로 뽑혔다. 정씨의 매매사이트에 몰래 접속해 투자패턴을 그대로 모방하는 일을 그만둘까 했지만 미련이 남았다. 이씨는 “결혼을 하려면 정규직이 돼야 했고, 그러려면 실적이 좋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후 이씨는 아예 회사 사무실에 사설 인터넷 선까지 깔고 정씨의 주식거래내역을 무려 500번 가까이 들여다봤다. 증권사 고객의 돈도 정씨가 투자하는 대로 470여 종목의 주식을 사고 팔아 수익이 나게 해줬다. 거래금액만 210억원이다. 자신도 1억원 정도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당시는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주식시장이 폭락할 시점인데, 이씨는 정씨 덕에 돈을 벌었다. 회사의 인정을 받은 이씨는 지난해 7월 정식사원이 됐다. 그러나 꼬리가 너무 길었다. 자신이 접속하지 않은 시간대에 로그아웃 기록이 있는 걸 이상히 여긴 정씨는 K증권에 문의해 다른 아이피(IP)에서 자신의 아이디로 접속한 사실을 확인했고, 경찰의 협조를 얻어 이씨를 붙잡았다. 자신의 한때 동료가 범인이라는 사실에 정씨는 “개인적으로 메신저 등을 통해 부탁했으면 매매종목을 알려주고, 의견도 나눴을 텐데 씁쓸하다”고 말했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이날 이씨에 대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소속 투자상담사의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D증권사와 2009년부터 이씨에게 정보를 받아 투자한 송모(35)씨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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