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음식남녀] 아네모네 한 다발의 '사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음식남녀] 아네모네 한 다발의 '사치'

입력
2010.03.26 00:03
0 0

결혼 전, 지금의 남편이 살던 집에 가는 날은 하루 종일이 '긴장' 그 자체였다. 남편이 10년 넘게 살며 학창시절을 다 보냈다는 낯선 동네, 낯선 이웃들, 낯선 주차장, 낯선 아파트의 낯선 승강기. 그리고 낯선 401호의 현관을 들어서면 그러나 낯익은 꽃 향기가 나를 반겨 주곤 했다.

시어머니는 화초 가꾸기를 즐기셔서 베란다에 매실 엑기스나 조청을 담은 병과 함께 여러 개의 화분이 늘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오기로 한 날이면 노란 프리지아 꽃을 한 다발 사다가 소박한 유리병에 꽂아 두셨는데, 노란 프리지아는 바로 나의 친정 엄마도 좋아하는 꽃이었다. 하고 많은 꽃 중에 시어머니 될 분과 친정 엄마의 기호가 '노란 프리지아'로 모아졌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하던 마음이 다소 편안해지던 기억이 난다.

집안에 꽃이 있으면 그 안에 사는 사람이나 그 집에 놀러 가는 객이나 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평소에 식물을 가까이 하고, 특별한 손님이 오는 날 향기 좋은 꽃 한 다발을 따로 사다 꽂을 줄 아는 안주인이 있는 공간에서는 다리가 휘어지게 차린 밥상 아닌 정갈한 물 한잔만 대접 받아도 기분이 맑아진다.

살림을 6년째 가꿔오고 있는 나에게 양가 엄마들의 화초 사랑, 꽃 사랑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맞벌이를 한다는 핑계로 겨우 살린 화분을 가물게 방치하거나, 봄이 벌써 왔건만 꽃 한 송이 집안에 두는 것을 잊는 날이 다반사다.

그래서 오늘은 사무실 나가는 길에 연분홍으로 물든 아네모네를 한 다발 샀다. 세 등분해서 꽃병에, 깨끗이 씻어두었던 과일잼 병에, 그리고 유리컵에 나눠 꽂고 사무실 구석마다 두었다. 오전에 방문하는 손님마다 늘 보던 공간인데도 봄이 정말 온 것 같다며 좋아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올라 평소보다 더 맛있게 커피도 타고, 꽃집 앞 베이커리에서 갓 구워낸 호밀빵도 두툼하게 썰어 여러 사람에게 선뜻 대접했다. 발그레한 꽃 봉우리에서 향내가 폴폴, 또 연하게 탄 커피와 담백한 호밀빵은 이른 아침 나를 찾아 온 몇몇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기 충분했다.

월말이라 얇아진 지갑은 오늘 나의 여유를 '사치'로 단정하겠지만, '명품 백도 아닌 꽃 한 단인 것을!' 하고 모른 척 해본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