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거행한 의거는 조선 독립의 일부분이며, 나는 의병 참모중장이라는 신분으로서 적국과 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일반적인 자객과는 다른 것이므로 반드시 적군에게 붙잡힌 포로로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1910년 2월 9일, 안중근 의사 2차공판 진술)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일본 법원의 재판을 받은 뒤 불과 5개월 만인 이듬해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안 의사의 재판 과정에 대한 분석은 그를 테러리스트로 폄훼하려는 일본측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홍일식) 주최로 24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의사순국백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안중근 의사의 공판 기록과 안 의사가 그 과정에서 주장한 논리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일제에 대한 정당한 저항행위로, 국제법상 합법적인 교전행위에 의한 것임을 입증한다"며 안 의사 재판의 부당성을 집중 조명했다.
"법률문명 가치 부정한 수치스런 재판"
참가 학자들은 1910년 2월 7일부터 모두 6차례 진행된 안 의사에 대한 공판은 이 사건이 국제적 이슈로 진화되는 것을 막고 안 의사를 무모한 암살자로 몰아가려 했던 일본 정부의 정치적 공작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토 사살은 의병장으로서 군인의 직무를 행한 것이라는 안 의사의 '의병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정당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일본의 주장을 무력화할 수 있는 핵심이다. 박정원 국민대 법대교수는 안 의사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 '비정규군도 교전 자격자로 인정한다'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채택된 육전규칙 제1조를 들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안 의사 의거 당시 의병은 교전 자격을 갖췄다.
1907년 대한제국군대해산 이후 거병한 관동창의대, 13도창의대와 같은 연합부대는 위계질서를 갖춘 조직적 군대였다. 뿐만 아니라 13도창의대는 1907년 12월 서울 진격 작전에 앞서 각국 영사관에 교전단체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는 등 국제법상 전쟁원칙을 인식하고 교전에 임했다. 안 의사는 재판관의 심문에 자신이 속한 의병조직인 '연합대한의군'은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부대였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일본에 대한 의병의 선전포고가 없었으므로 안 의사의 의거가 군사행위가 아니라는 일본의 논리도 미약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도 일본군은 선전포고 없이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의병전의 경우 교전 당사자가 의병과 일본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질적인 침략행위를 감행한 일본군이 전쟁을 개시한 셈이다.
안 의사 재판은 공정성 측면에서도 결격사유가 있었다. 뚜원총(杜文忠) 중국 서남민족대 교수와 린지엔(林堅) 중국인민대 교수는 심리 과정에서 안 의사의 변호권이 근본적으로 박탈당했다는 점을 들어 재판의 부당성을 밝혔다. 변호인 선임도 일방적인 관선변호사로 이뤄졌고, 일본측이 정통 일본어로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변호사 선임을 거부한 것은 변론권의 행사를 방해하는 요소였다는 것. 뚜원총 교수는 "안중근의 기본인권을 박탈한 것은 근대 이래 형사법률상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던 기본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며 "이는 인류의 기본 법률문명 가치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것이며, 대단히 저급하고 수치스러운 재판"이라고 덧붙였다.
"2,000만 형제자매여 분발하자"
일본 형법의 적용, 변호인 접견 금지, 변론권 제한, 공판의 빠른 진행 등 재판의 공정성이 침해된 상태로 심리가 진행됐고 사형이 언도됐음에도 안 의사는 항소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사형 집행 전날인 3월 25일 안 의사는 두 동생 정근, 공근을 만난 뒤 유서와 같은 편지 6통을 전하고 면회 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남긴 뒤 당당하게 최후를 맞았다. 이 글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안 의사의 통절한 염원이 담긴 글이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해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무단 전재 및 재배?금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