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맞는 오늘의 의미와 감회는 각별하다. 100년 전 우리는 왜 나라를 빼앗겼으며, 32세의 열혈청년 안중근은 왜 일제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을까? 남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모두 진지하게 성찰할 때이다.
안 의사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되는 대표적 위인이다.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독립 운동가일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설득력을 지닌‘동양평화론’을 제창한 사상가로 추앙되고 있다. 일본학자들도 그의 동양평화 사상을 칸트의‘영구평화론’과 비교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시대를 앞선 ‘동양평화론’
안 의사는 일제 법정에서 자신의 의거가 동양평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동양평화론의 핵심은 한중일 3국이 자주독립을 유지하며 평화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고 공동의 금융기구(은행)와 군대, 화폐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또 세 나라 젊은이들이 서로 상대국 언어를 공부하여 우의를 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동양평화론과 평화사상은 하토야마 유키오 현 일본 총리의‘동아시아공동체론’과 비교되기도 하며, 그 뿌리로서 주목 받기도 했다. 침략과 저항, 지배와 피지배 등 제국주의 열강과 약소국의 투쟁이 일상화하고 있던 20세기 초에 동양평화를 내세우며 한중일 등 동아시아국가의 연대를 제창한 사실은 매우 주목된다. 후소샤판 교과서의 복사판으로 평가되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지유샤 발행 <신편 새로운 역사교과서> (2009)조차 “이토는……1909년 만주시찰 도중 하얼빈역에서 한국 독립지사 안중근에게 사살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정도로 일본에서도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한 인식은 바뀌고 있다. 신편>
안중근 의사는 다수의 시문과 57폭의 유묵을 남긴 문필가였다. 이를 통해 그의 사상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잘 알려진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만나면 목숨을 바쳐라’는 유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주고 있다. 항상 이익보다는 정의를 생각하고 자기가 맡은 모든 일을 목숨을 던질 만큼 비장한 각오로 처리하고 마무리한다면 되지 않을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위상은 100년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발전은 말할 것도 없이 신명을 바쳐 투쟁한 유명·무명 순국선열들의 피와 땀과 눈물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다. 우리가 안 의사의 숭고한 업적과 뜻을 기리고 받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숭고한 뜻 올바로 계승을
순국 100주년을 맞아 정부는 일제가 숨긴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한중일 공동발굴을 추진하기로 했다. 민관합동유해발굴단도 구성한다고 한다. 물론 유해를 찾아 모시는 것은 후세의 도리이고 오랜 염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 정신과 유지를 올바르게 계승, 발전시키는 일일 것이다.
선각자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 목숨을 던져 이루고자 했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한다. 안 의사가 그랬듯 우리 후손들을 위해 길이 영속할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일궈 나가겠다는 다짐과 각오가 필요하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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