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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7> 영의정 이준경의 유차(遺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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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7> 영의정 이준경의 유차(遺箚)

입력
2010.03.2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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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선조 5) 2월에 영의정 이준경이 죽었다. 죽기 전에 그는 붕당이 생길 것을 걱정하는 유차를 올렸다. 그랬더니 이이(李珥)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이는 "옛사람은 장차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한데 이준경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악하다"고 받아쳤다. 만일 신하 중에 사사로이 붕당을 짓는 자가 있으면 재상의 지위에 있을 때 명백하게 전하에게 아뢰어 이를 없애지 않고 왜 이제 죽어가면서 분명치 않은 말로 사림을 어륙(魚肉)을 만들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철(鄭澈)은 이준경의 관작을 삭탈해야 한다고 했으나, 유성룡(柳成龍)이 "대신이 죽음에 임해서 드린 말씀인데 불가하면 그 옳고 그름을 가리면 그만이지 관작을 추탈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이제 만약 그의 관작을 추탈하면 국체에 해가 될 것 같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유야무야 되었으나 이준경이 죽은 지 3년 후인 1575년(선조 8)에 과연 동 ․ 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선배·후배 사림의 시국관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준경은 선배그룹의 대표요, 이이는 후배그룹의 대표라 할만하다. 이준경은 이이가 지나치게 따지고 남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것을 싫어했다.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가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을 경계했다. 반면에 이이는 당시의 정국이 무너지기 직전의 초가집 같으니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경장론(更張論)이다.

출처관(出處觀)도 달랐다. 이이는 왕이 개혁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나와서 돕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후진이나 양성하겠다는 태도였다. 반면에 이준경은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간에 왕을 도와 경세(經世)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임금의 예우에 따라 진퇴하는 것은 기회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혁이냐 보합이냐의 차이이다. 대신인 이준경은 보합을, 신진세력의 대표인 이이는 개혁을 택한 것이다.

이황(李滉)이 우찬성이 되어 서울에 왔을 때 축하객이 몰려 3일 뒤에 영의정인 이준경을 찾아가자 이준경이 조광조처럼 죽고싶으냐고 한 바 있다. 사화를 예방하자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뒤에 대신 김개(金鎧)가 이황을 공격할 때 이준경은 김개를 실각시키고 이황을 보호했다.

시국관의 차이는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립이 심해져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정쟁이 생기게 마련이다. 선조 조의 초기당쟁은 이러한 명종 조의 신·구 대립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당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던 이이는 동·서 분당의 와중에서 이를 보합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만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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