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8> 남대문시장-저항과 배금주의가 교차한 식민의 현장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8> 남대문시장-저항과 배금주의가 교차한 식민의 현장

입력
2010.03.23 08:28
0 0

■ 일제가 상권 장악해 키운 최대시장… 지금은 日관광객 쇼핑 명소

일제 강점기 삶의 공간은 대부분 과거 시제 속에 존재한다. 흔적이 있더라도 기능이 멎은 채 문화재로 남았다. 시장은 예외다. 거래와 유통, 소비의 양태는 바뀌어도 시장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제 목적의 피돌기가 진행 중인 현재의 공간이다. 서울의 남대문시장이 대표적인 공간. 이곳은 태생부터 일본인의 한반도 진출과 관련이 깊다. 비록 식민 시기의 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일어로 쓴 호객 문구가 지금도 상점마다 붙어 한 세기 전 풍경을 어렵잖게 상상하게 만든다.

22일 비교적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대문시장은 북적댔다. 하루 유동 인구는 40여만명. 여러 차례의 화재와 잦은 증ㆍ개축으로 식민시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인파만큼은 자료로 들고 간 1920~30년대에 촬영된 사진 속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남대문시장은 선혜청(대동미 등의 출납을 관장하던 기관)의 창고 자리에서 시작됐지만 19세기 말 이후 확대를 거듭, 현재는 4만여㎡의 부지에 1만 개 가까운 점포가 들어서 있다. 옛 사진 속의 남대문시장은 옹기장수와 나무꾼, 구럭에 닭을 넣어 온 장사치들로 붐볐고, 현재의 시장은 패션 소품을 파는 상점들이 주로 목 좋은 자리에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남대문시장은 숭례문 근처에 있던 칠패시장이 이전ㆍ확대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어물상 등이 숭례문 밖에 모여 자연스레 시장을 이뤘다. 점차 규모가 커져 19세기 말에는 종로 시전, 이현시장(동대문시장의 전신)과 함께 서울 3대 시장을 형성했다. 칠패시장은 대한제국 초인 1896~97년 도로 정비 사업에 따라 지금 자리로 이전된다. 황성신문은 1898년 "남문 내외 장시를 선혜청 내로 이설"했다고 보도했는데, 이것이 근대적 형태의 남대문시장의 탄생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일제는 1910년 강제병합으로 통치권을 확보하기 전부터 조선의 상권 확보에 나섰다. 침탈의 그림자는 조선왕조실록 고종 35년(1898) 9월 29일자 기사에 이렇게 드리워있다. "근래 외국인의 상업은 날로 흥성하는데 우리나라의 상업은 나날이 더욱 쇠잔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서울 상업계는 모두 저들이 점령하고 오직 중앙의 한편에 겨우 손바닥만큼 남아 있으니…."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하던 시기, 서울의 상인들도 저항 운동에 나섰다. 1886년 시전 상인들의 집단적 저항 운동을 시작으로 상업회의소 설립, 철시(撤市)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의 상권 장악에 대응한다. 그러나 봉건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던 대한제국 정부는 근대 자본주의의 침탈에 무력했다. 이 시기 집중적으로 체결된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은 국내 시장 보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일제의 경제 침략 계획은 치밀했다. 일제는 이미 1905년 화폐개혁을 실시, 일본 제일은행권을 공식 화폐로 만들었다. 조선총독부가 설립된 뒤에는 토지조사와 동시에 전국의 시장조사를 실시했다.

기층민들에게 정치적 조약이나 칼을 찬 순사보다 무서운 것은 이런 생활경제의 변화였다. 1931년 2월 1일 발행된 월간 '삼천리'는 서울의 상업 경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성 전체의 상가를 보면 남ㆍ북의 양촌으로 그 경계선이 너무 분명하게 되어온 지가 오랜 일이다. 그러나 때가 감을 따라서 그 경계선이 점점 북촌으로 다가감을 매년 깨달을 수가 있다… 남촌 상가가 확대됨을 따라서 조선 사람들이 상점은 동대문ㆍ서대문 쪽으로 밀리며, 또 그 수가 줄어갈 뿐이라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진고개 일대의 혼마치(本町ㆍ지금의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상권이 서울 전역으로 확대되는 데 따른 위기감을 담은 기록이다.

그러나 피식민의 상황 속에서도 남대문시장은 성장을 계속했다. 이완용 내각의 송병준(1858~1925)이 갖고 있던 남대문시장의 경영권은 1922년 일본인 소유의 중앙물산주식회사로 넘어갔다. 당시 남대문시장의 1년 판매고는 109만원. 동대문시장의 179만원에 비해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1931년 이 액수는 400만원 대 157만원으로 역전된다. 일제는 자신들의 서울 근거지인 진고개와 가까운 남대문시장을 장악하고 키운 반면, 조선인 상권이 맥을 유지하던 서울의 다른 시장은 압박했다. 이 구도는 해방 후에도 이어져 현재도 남대문시장이 서울 최대의 시장으로 남았다.

경제의 주도권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시장의 확대는 배금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경제권의 상실이 정신적 황폐화로 이어진 우울한 식민의 풍경이다. 1921년 10월 발행된 '개벽'은 당시의 배금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총독정치가 시작되며 이래 십년간 학식도 문벌도 인격도 다 쓸데가 없고 오직 돈만 있으면 한 자리라도 얻어 하게 되는 판에 일반은 다시 한번 돈의 위력을 느꼈고… 돈 한 가지 없어 그리 못함을 느끼는 때 일반은 가장 절실하게 돈의 필요를 느끼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 비틀린 경제구도, 당시도 사회 문제화

나라가 망했다고 사람들의 살림살이도 다 망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식민통치의 시작은 근대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공맹의 글을 읽는 것 외엔 다 잡스러운 일로 치부하던 양반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보편화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전근대의 천석꾼, 만석꾼과는 다른 근대적 개념의 부자가 등장한다.

1913년 8월 2일자 황성신문은 서대문 밖의 유리공장 확대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공장은 이재원씨가 자본금 오천원을 저축하여 설립한 지 4개년에 업무가 점점 발달하는 중 금번에 이재현씨가 일층 확장할 목적으로 오천원을 더하야…" 기사에 등장하는 이재현은 황족으로 경상도 관찰사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는 한일병합 직후 잡화상을 차리고 상놈으로 하대하던 이들에까지 굽실거리며 장사를 한다. 그는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훗날 유통업과 부동산업까지 진출한다.

대중적 월간지였던 '삼천리'는 1930년 11월호에 '조선 근대 삼대 재벌 총해부'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부가 대중적 선망의 대상이 됐음을 보여주는 기사다. 여기서 3대 재벌로 등장하는 인물은 김성수, 민영휘, 최창학이다.

'삼천리'는 이들이 소유한 회사와 토지, 주권(株券) 등의 내역을 공개하며 부자를 향한 식민지 민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지금 화폐가치로 따져 수억원이 넘는 자동차를 소유한 인사들의 면면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부의 편중과 왜곡된 분배, 비틀린 경제구조 등도 이미 식민시기에 구체화됐다. 당시 매일신보 사장 월급이 500원 정도였는데, 화류계의 유명짜한 기생들이 한 달에 수만원씩을 저축한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하기도 했다.

유상호 기자

■ "5일場은 민초들의 주체적 에너지가 응집된 무대"

장(場) 또는 장시(場市)라고 불리는 한국의 정기 시장은 5일을 주기로 규칙적으로 열리기 때문에 5일장이라고도 한다.

유기적인 장시망은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배경으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일제 시기를 거쳐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까지 장시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농업에 기반을 둔 경제단계에서 농민이 중심이 되는 장시와 같은 국지적 정기시장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서구의 이론들은 산업화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달에 따라 이러한 정기시장이 상설화되거나 근대적 상설시장에 의해 대체되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바꾸어 말하면 농촌 정기시장의 존속은 일반적으로 해당 사회의 경제적 낙후성을 증명하는 징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일제 역시 한반도 전역을 무대로 1,000개 이상의 장시가 5일 주기로 연쇄적으로 열리고 그 수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장시 현장'을 식민지 조선의 후진성과 동일시했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근대적 진화를 왜곡시킨 식민지배의 부작용 때문에 그러한 퇴행적 현상이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과연 식민지시기 장시의 발달은, 근대화의 영향 밖에 있던 잔존영역이거나 또는 그러한 변화에 역행하는 '기형적 현상'이었을까.

최근 학계의 논의는 한 사회의 근대적 변화 과정을 서구가 걸어간 '정상적인' 근대화와 식민지 등에서 나타난 '비정상적인' 근대화로 나누는 이분법을 비판하는 데 집중되어 왔다.

이것을 적용해 보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농촌 장시는 식민지 근대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여 그 체제의 일부분으로 재편됨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다. 효율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시장망을 토대로 장시는 일본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농산물 등을 수집, 배출하는 기능과 자본주의적 상품을 배급, 판매하는 통로로 기능했다.

또한 식민지 체제의 핵심 주체인 농민들이 식민지 농정이 가져온 빈곤 속에서나마 근근이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 역시 장시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시가 식민지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라 일방적으로 포섭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시 장시의 역할을 인정하고 활용했던 조선총독부조차도 장시를 통제하고 최종적으로는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장시는 낙후되고 비효율적인 제도였을 뿐 아니라, 3ㆍ1운동에서와 같이 한국인들이 주체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위험한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장시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계기를 거의 갖지 못했던 민초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응집시키고 표출하는 무대였다. 따라서 농민들로부터 장시를 빼앗아가려는 시도는 언제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러한 한국인들의 믿음과 실천이 일제시기 나아가 해방 이후까지 지속된 장시의 증가와 발전을 낳았던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