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여당과 사법부가 크게 충돌한 사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존재했다. 그때마다 크고 작은 차이점이 있지만, 주로 판결에 대한 여당의 불만이 발단이 됐고, 법관인사가 주요현안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선 닮은 부분도 적지 않다.
최초의 충돌은 1950년대 이승만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반정부 인사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등의 형사재판에서 잇따라 무죄가 나오자, 이 대통령은 사법부를 장악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58년 이 대통령은 2대 대법원장에 자유당 당원인 전 법무장관을 앉히려다 실패했다.
이후 그는 아예 법관회의의 제청으로 대법원장을 임명한다는 규정 자체를 법원조직법에서 빼려 했으나 이마저도 성사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결국 법관의 연임여부를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결정하는 법관연임법을 그 해 통과시켰다. 결국 58년 연임 제청된 법관 52명 중 조봉암 선생에 대해 일부 무죄판결을 내렸던 유병진 서울지법 부장판사 등 13명이 연임발령을 받지 못했다. 조용순 대법원장이 이 대통령을 방문해 우려의 뜻을 전했으나, 60년 대통령 하야 때까지 이 같은 상황은 계속됐다.
이후 사법부가 공식 인정하는 2차례의 사법파동도 반정부적 판결이나 정부의 법관인사권 개입 등이 계기가 됐다. 71년 1차 사법파동은 법원이 당시 시국사범에 무죄를 선고하는 일이 잦아지자 검찰이 무죄판결이 많은 특정 판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벌어졌다.
직후 전국 법관 150여명이 사표를 제출하며 반발했으나 결국은 72년 유신시대로 접어들면서 사법부도 암흑기로 들어선다. 2차 사법파동은 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5공화국에서 활동한 김용철 대법원장 등 수뇌부를 재임용하려 한 것이 발단이 됐다. 당시 판사 330여명은 대법원장 퇴진을 요구하며 극렬히 반발했고, 김 대법원장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