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배생활을 끝내고 운동일선으로 복귀하자 민중운동단체의 연대조직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민청련이 결성되어 활동을 해나가자 여러 곳에서 민중운동단체들이 생겨났다. 노협(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민문협(민중문화운동의회), 민불련(민중불교운동연합)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민중운동단체들과 이미 있던 가농(가톨릭농민회), 기농(기독교농민회) 등이 연대할 조직적 틀이 필요했던 거다.
나는 민중운동단체의 연대조직 이전에 재야 유명인사들의 조직화가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으나, 일단 연대조직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으니 이 일을 매듭짓기로 했다.
연대조직은 주로 이부영, 김근태씨와 상의해서 추진했는데, 재야 유명인사의 조직화에 부정적이었던 이들이 연대조직 결성에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특히 민청련은 운동주도권과 관련하여 연대조직 결성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어쨌든 민중운동단체의 연대조직은 별다른 논쟁 없이 결성됐는데, 그 명칭은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로 했다. 그런데 나더러 사무국장을 맡으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나는 재야 유명인사들의 조직화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민민협이 결성되자 나는 곧바로 재야 유명인사들의 조직화에 나섰다.
그런데 재야 유명인사들의 조직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민청련이 강하게 반대했다. 반대의 실질적인 이유는 운동의 주도권 때문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계급적 관점에서 재야 유명인사들은 지식인으로 '프티 부르주아' 계급이어서 민중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명망가'라는 딱지를 붙여 재야 유명인사를 폄하하는 경향마저 보였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시대착오적인 계급적 이유를 내세우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재야 유명인사들이 얻은 '명망'을 무슨 불명예나 되는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더 우스운 일이었다. 그만한 '명망'을 얻기까지 엄청난 투쟁과 고난을 겪었음을 무시했다. 자신들보다 더 열심히 투쟁해서 얻은 '명망'이라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터에 거꾸로 폄하하려 드니 운동윤리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대세였다. 계급적 관점을 들이대면 꼼짝 못하는 게 운동권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종로5가'로 지칭되던 기독교운동권도 재야 유명인사의 조직화를 강력히 반대했다. 공식적 이유는 민중운동권과 비슷했지만 실질적 이유는 문익환 목사에 대한 견제였다. 한국기독교운동은 '종로5가'가 모두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야 하는 터에 문 목사가 운동 일선에서 활동하게 되면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자금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종로5가'의 실세였던 권모 목사와 김모 목사가 나를 점심에 초대했다. 재야 유명인사의 조직화를 포기하고 민민협 사무국장을 맡으면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거였다. 인간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요구였지만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우리 운동의 승패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재야 유명인사의 조직화를 위해 나선 나는 우선 문익환 목사와 계훈제 선생, 백기완 선생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분들은 이미 그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동의했다.
문제는 이 일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유명인사들은 일거수일투족 감시 받던 때라 이 사람들의 조직화는 대단히 어려웠다. 이런 때는 신부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나는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이창복씨를 만나 재야 유명인사의 조직화가 필요함을 역설했더니 크게 공감했다.
우리는 곧바로 함세웅 신부를 찾아갔다. 재야 유명인사의 조직화가 필요함을 설명하고는 이에 참여할 만한 신부들을 소개해 줄 걸 부탁했다. 함 신부는 전국적으로 약 40여명의 신부들 이름을 적어 주었다. 이창복씨와 나는 그 명단을 가지고 전주, 익산, 광주, 목포, 마산, 부산, 대구, 안동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돌며 신부들을 만났다. 신부들에게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더니 대찬성이었다. 자신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인근의 신부들까지 소개해 주었다. 전국을 돌아 서울에 와서 명단을 취합하니 180여 명이나 되었다. 재야조직을 만드는 데 신부가 200명 가까이 참여한다면 그것 자체로서 엄청난 성공이었다.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 이창복, 나 등은 여러 차례의 회합 끝에 '민주·통일 국민회의(국민회의)'를 결성하게 됐다.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 선생과 신현봉 신부, 중앙위 의장에 강희남 목사, 서울민통련 의장에 백기완 선생을 선출했다. 그리고 이창복씨가 사무처장을 맡고 나는 사무차장을 맡았다.
그런데 국민회의는 출범하자마자 운동의 중심이 됐다. 수사기관에서도 국민회의에 주목했지만 국민이나 민중운동단체들도 국민회의에 주목했다. 유명인사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학생이 구속되거나 노동자가 폭행 당해도 국민회의로 찾아왔다. 국민회의에는 앞에서 언급한 분들 외에도 이두수 목사, 유운필 목사, 곽태영 선생 등 수사기관 등에 찾아가 항의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회의와 민민협의 통합문제가 제기됐는데,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국민회의의 실무를 총괄했던 이명식의 역할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당시 'CNP논쟁'(다음 회에 기술)에 따라 국민회의가 '시민민주주의라'는 개량주의로 몰리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이 국민회의에 오는 걸 기피했다. 그만큼 이데올로기(ML주의)에 주눅들어 있었다.
그런 때에 고대 출신으로 민청련에서 일하던 이명식이 국민회의에 왔다. 국민회의는 어른들 위주여서 강연, 집회에서의 연설, 항의방문,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투쟁 격려 등으로 바빠 정책개발이나 사업기획, 성명서 발표 등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을 이명식이 다 해냈다. 이명식이 있었기에 국민회의가 활동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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