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ㆍ284쪽ㆍ1만원
엄마와 노숙 생활을 하다가 아비를 알 수 없는 아이를 낳게 되는 소녀('열세 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려 가족들 몰래 대리모가 된 여대생('엄마들'), 재혼하는 엄마에게 버림받고 생면부지의 떠돌이 장사꾼과 살림을 차린 여자('순애보'). 지난해 발표한 경장편 <나쁜 피> 로 주목받은 소설가 김이설(35)씨가 등단 4년 만에 펴낸 첫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엔 신문 사회면 한 구석에서나 접할 법한, 비참한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김씨는 당초 이 책 제목을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지으려 했다 한다. 아무도> 나쁜>
수록된 8편의 단편은 언뜻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을 떠올리게 하지만, 김씨의 작품은 그것과는또다른 면모를 보인다. 플롯은 사건의 시간 순서를 뒤바꿔 배치하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폭력과 궁핍, 병고에 시달리는 등장인물들의 비참한 처지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들의 감정을 좀체 보여주지 않는 간결한 문장이 우직하게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그 와중에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분명하게 벌어지고 있는, 그러나 우리가 최소한의 연민도 갖지 못한 채 풍문처럼 지나쳤던 비극적 상황들이, 도축된 짐승의 속살처럼 선연하게 드러난다.
'열세 살'의 주인공 소녀는 자신이 삼촌이라 부르는 노숙자들에게 천원짜리 몇장을 받고 성교를 한다. 소녀는 여느 삼촌들과 달리 차림새가 말쑥하고 돈도 더 많이 주는 '흰얼굴'에게 애정을 느끼는데, 그는 소녀와 동침하며 노숙 생활을 잠입 취재하는 파렴치한 기자다.
소녀의 보호자인 엄마는 새벽부터 자정까지 딸을 방치한 채 멀리 떨어진 지하철역 계단에서 구걸을 한다. 결국 미혼모가 돼 노숙여성쉼터에서 몸을 푼 주인공은 '엄마를 닮아 우뚝 솟은 검고 단단한' 자신의 젖꼭지를 내려다보며 인생 유전을 예감한다.
이 소녀가 그렇듯, 김이설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구태여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견딜 뿐이다.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처지에 놓인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괜찮다"고 위로하며 다독인다.
'순애보'의 여주인공은 새로운 인생을 살라며 자신을 놓아주려는 남자에게 되레 칼을 휘두른다. 김씨 소설 주인공들의 이 지독한 체념, 그것이 개인의 결핍을 지체없이 사회구조적 문제와 연결짓던 전통적 리얼리즘과 결별하게 하는 한편, 작품을 더욱 비극적이게 한다.
작가는 그러나 마냥 이같은 체념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오늘처럼 고요히'에서 여주인공은 죽은 남편의 형인 동거남의 폭력과 성적 학대를 고스란히 견디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거둔 친구의 딸에게까지 동거남이 마수를 뻗치자 그를 살해한다. 이처럼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여성의 모습은 작가의 전작 <나쁜 피> 로 연결된다. 김씨는 "작게는 개인적 아픔부터 크게는 억압적 권력에 고통받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쓸 것"이라고 말했다. 나쁜>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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