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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카메라 없이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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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카메라 없이 떠나기

입력
2010.03.2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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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판 신문은 봄소식으로 가득하다. 남도에선 벌써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꽃구경 뒤에 섬진강에서 재첩국 한 사발 먹으면 어떻겠냐고 옆구리를 찌른다. 눈이 솔깃한 얘기지만 가볍게 떠날 형편도 안 되고 그럴 주변머리도 없다. 입맛을 다시다가 그저 책을 펴 든다. 창 밖의 봄볕이 눈에 밟혀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질 않는다. 같은 문장을 서너 번 맴돌다가 결국 책을 덮고 일어섰다.

차를 타고 멀리 가기는 늦었고, 어디로 갈까 헤아리며 슬슬 걷다 보니 어느새 가회동이다. 예까지 왔으니 오랜만에 북촌 한옥마을이나 한 바퀴 돌아보자 하고 호젓한 골목길을 찾아 들었다. 번듯하게 새로 지은 집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래된 한옥들이 지붕을 맞대고 이어지는 풍경은 예스런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앞에 불쑥 커다란 카메라 렌즈가 나타난다. 전문가용 카메라를 든 젊은 남녀가 골목 안 풍경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좁은 골목길에 비슷한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자칫하면 반갑잖은 피사체가 될 판이라 서둘러 골목을 빠져 나오는데 입맛이 쓰다. 모처럼 옛 마을을 산책하며 봄날을 즐기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도 아쉽거니와, 너도나도 큼지막한 카메라를 들고 렌즈 속 세상에만 몰두하는 모습도 씁쓸하다.

1839년 발명된 카메라가 모두의 기호품이 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온통 렌즈로 뒤덮이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구석구석 설치된 CCTV에 일거수일투족이 따라 잡히고, 남의 손에 들린 휴대폰 카메라까지 맘을 써야 하더니, 이제는 한가로이 휴식을 즐기다가도 주위를 둘러봐야 하는 지경이다.

일전엔 동네 공원에서 아기 엄마가 카메라를 든 사람과 옥신각신하는 걸 보았다. 아기 엄마가 왜 몰래 남의 사진을 찍느냐고 하자 사진을 찍던 사람이 없애면 될 것 아니냐며 성을 내면서 생긴 일이었다. 엄마와 아기가 노는 모습이 예뻐 저도 모르게 셔터를 누른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찍히는 사람 마음은 다를 수 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그의 불찰이다. 졸지에 누군가의 대상이 된다는 게 꼭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자신이 택한 대상을, 자신이 정한 프레임 안에, 자신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담는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수잔 손택이 말했듯이, 그 과정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자신이 마치 어떤 지식을 얻은 듯, 어떤 힘을 얻은 듯 느낀다. 실제로 그가 대상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매우 표피적이고 일면적이지만, 사진은 그 자신이 보는 것을 영원 불멸한 것으로 만들어 합리화한다. 그리고 피사체로 선택된 사람이나 사물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카메라는 알지 못한다. 아니, 관심도 없다.

너나없이 카메라를 든 이 세태가 불안한 것은 그래서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독선, 상대를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만 대하는 오만, 우리를 먹고 살게 해주는 이 지구를 풍경으로만 보는 무지가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강을 살리겠다며 강가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이나, 식당에서 밥을 시켜서 밥은 손도 안 대고 사진만 찍고 가는 것이나, 삶을 업신여기는 것이 갈수록 심하다. 이래서는 아무리 고성능 카메라도 소용없다. 삶이 이토록 비루해졌는데 어찌 아름다운 사진을 기대하랴. 정말 세상을 보고 싶다면 카메라는 두고 떠나자. 삶은 렌즈 밖에 있다.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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