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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지푸라기 속 봄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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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지푸라기 속 봄꽃들

입력
2010.03.19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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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비에 땅에서 돋아나는 봄 속도가 빨라졌다. 꽃샘 추위에 황사까지, 봄비 뒤에 오는 일기가 영 마땅찮다. 그런데 이 추위가 꽃샘추위이기나 한 것인가. 원래 3월 날씨는 봄날이라고 하기에는 추운 날씨였다. 아직 개나리도 진달래도 목련꽃도 피지 않았거늘.

하기야 지푸라기 속 들꽃을 보는 섬세한 사람들에게 꽃샘 추위라는 말이 맞기는 하다. 봄이 오는 속도를 벚나무의 개화 속도로 친절하게 표시하는 요즈음, 봄꽃은 들판이 아닌 도심의 나무로부터 오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화를 기다리고 벚꽃을 기다리고 진달래, 목련을 기다리는 동안 들판의 누런 지푸라기 속에선 봄꽃 잔치가 한창이다.

봄은 저 멀리 남도에서부터 올라오는 것도 맞지만, 땅 바닥에서 땅 높은 곳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봄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낮의 길이다. 입춘을 지나면서 낮 길이가 어느 정도 길어지기 시작하면 식물들은 깨어날 채비를 한다. 낮 길이는 기상에 관계없이 태양과 지구의 위치로서 결정되기에 거의 안정적인 패턴을 갖는다. 물론 온도도 적당하면 좋겠지만, 오늘과 같이 꽃샘 추위가 온다고 해서 주저할 수는 없다.

풀들이 따스한 날을 기다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나뭇잎이 피어나면 빛은 나뭇잎에 가려지고 만다. 그래서 땅 위의 어린 식물들은 큰 나무들이 잎을 피워내기 전에 서둘러 피어나야 한다. 큰 나무는 큰 몸집에 필요한 물을 대느라 잎을 틔우는데 긴 시간이 걸린다. 그 틈에 작은 식물들이 싹을 내는 것이다. 적당한 비가 흙의 맨 위쪽만 살짝 녹여주어도 풀들은 피어난다. 풀들로 지상이 푸르게 메워지면 비로소 공중에서 나무의 싹이 깨어난다. 이처럼 봄은 땅 위의 풀에서 관목에서 그리고 큰 나무로 전달된다.

그러니 '눈에 띄는' 꽃을 피우는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내민 지금쯤이면 땅 위의 봄은 이미 꽃 릴레이가 한창이다. 냉이, 쑥, 달래야 꽃이 없어도 허기진 봄에 요긴한 먹을 거리였으니 그 이름이 별스럽지 않아도 별스러운 봄 식물이다. 그러나 냉이나 쑥을 벗어나면 봄 식물들은 그야말로 이름에서 '봄' 맞이를 하고 있다.

논두렁의 지푸라기 밑으로 숨어 피어나는 개불알 풀에서 허기를 벗어난 사람들의 익살스런 해학을, 여린 꽃대를 앙증맞게 피워 올린 봄맞이꽃에서는 자연에 대한 애처로운 감성을 읽을 수 있다. 명이(산마늘), 며느리밥풀, 이질풀이라 이름 짓는 판국에 제비꽃, 꽃마리, 꽃다지, 광대나물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가당하기나 한 이름들인가. 냉이와 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보니 봄 세상이 좀 여유롭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냉이나 쑥을 캐기 위해 지푸라기를 헤집지 않고서는 이 깨알같이 작은 봄 생명을 알 길이 없다.

요즈음의 봄은 다소 씁쓸하다. 냉이는 대형 마트에서 봄 상품으로 출하되고 아이들은 산촌 유학을 떠나 쑥 캐는 체험을 한단다. 땅이 거저 쏟아내는 이 다정한 봄 생명들을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사먹는다. 진도의 바닷바람이 아무리 좋은 쑥을 만들어낸다고 한들 이웃한 들판에서 칼로 쓱쓱 베어온 지푸라기 속 쑥만큼이나 하겠는가.

저 멀리 산수유, 매화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남도로 내려가는 번잡함 대신, 길 가장자리에서, 마당에서, 논두렁에서, 들판에서 뽀얗게 돋아나는 쑥을 캐러 가는 일은 어떨까. 그 틈에 꽃샘 추위 속에서 피어난 봄맞이꽃도, 개불알풀도, 광대나물도 만나보고. 말 그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쑥쑥 자라도록.

차윤정 생태전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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