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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남긴 숙제/ '책 절판 vs 독자 배려' 아름다운 마무리 해법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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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남긴 숙제/ '책 절판 vs 독자 배려' 아름다운 마무리 해법 없나

입력
2010.03.19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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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우리에게 어려운 숙제를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자신의 책을 절판해 달라고 당부한 법정 스님의 유언장이 공개된 17일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변택주 이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스님이 공증을 받은 유언장에 "그 동안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 가지 않으려" 한다는 뜻을 적시한 만큼, 스님의 제자들과 그가 세운 '맑고 향기롭게'는 유지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뜻을 널리 전하고픈 문도들이나, 계약을 맺고 책을 출간해온 출판사들에게 이 말은 쉬 풀리지 않을 화두가 됐다.

현재 법정 스님의 책을 내는 출판사는 범우사, 샘터, 문학의숲, 이레, 조화로운삶, 동쪽나라 등 6곳이다. 이들은 모두 "스님의 뜻이 분명한 만큼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절판의 시점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며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 (1976)를 출간한 범우사 윤형두 대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굳이 절판을 요청하신 데도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며 "현 시점에서 <무소유> 는 이미 절판됐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말했다.

반면 법정 스님의 근작을 출간하는 출판사들은 스님의 유지를 청천벽력으로 여기고 있다.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 등 스님이 최근에 쓴 6종의 책을 출간해온 문학의숲 고세규 대표는 "구체적인 손실을 따지기 전에 이런 소식을 언론을 통해서야 알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스님의 저작권을 상속한 '맑고 향기롭게' 측이 출판권 계약 당사자인 자신과는 아무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내용을 발표한 데 대한 섭섭함의 표현이다.

문학의숲이 내는 스님의 책들은 계약기간이 2018~2019년까지로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발간 준비를 거의 끝낸 미발표 책도 몇 권 있는데,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이 책들을 그냥 묻을 경우 이미 지출된 편집ㆍ디자인ㆍ삽화ㆍ교정 등의 비용은 고스란히 출판사의 손실이 된다. 고 대표는 "유지를 받들겠지만 지난해 4월 계약을 맺을 당시 스님께서는 '책을 잘 관리해 달라'고 당부하셨으니 절판에 대한 공식 협의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성실하게 책을 공급해야 할 의무 또한 남아 있는 셈"이라고 난감해 했다.

외국에서 번역돼 출간되고 있는 스님의 책들의 경우 문제는 더 복잡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법정 스님의 책은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 판매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맑고 향기롭게> 등을 외국에 수출한 조화로운삶 최연순 편집장은 "바로 지난 주에도 중국의 출판사와 법정 스님의 책 출판 계약을 맺었는데, 이 출판사가 절판 요청을 일방적 계약 파기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저작권을 다루는 법률 전문가들도 이 문제를 쉽게 결론짓지 못했다. 법무법인 원 김도형 변호사는 "책을 쓴 저자에게 저작권이 있듯이 출판 계약을 맺고 책을 찍는 출판사에게는 출판권이 있다"며 "저작권자가 책의 출판 여부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일단 저작권자가 거부하면 출판사가 책을 계속 찍을 수는 없지만, 이럴 경우 출판권자의 권리가 침해 받는 것이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경우 저작권자는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맑고 향기롭게' 변 이사는 "스님의 유언장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도 저작권을 상속하게 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각각의 처지를 떠나 모든 이들이 상처를 덜 받는 쪽으로 유지를 받드는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변 이사는 "스님은 '이 세상의 가장 큰 종교는 친절'이라고 말씀하실 만큼 배려의 마음을 중시하신 분"이라며 "스님께서 출판사들의 사정을 모르시지 않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뜻을 남기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누구든, 언제든 스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겠다'는 17일 발표에 대해서 "출판사의 고통,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최소화하면서 유지를 지키는 방법을 지금부터 논의하겠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한편 온ㆍ오프라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반디앤루니스는 18일 법정 스님의 책 40여 종의 판매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반디앤루니스는 "스님의 책을 구하기 위해 웃돈까지 제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스님의 유언에 반할 뿐 아니라 무소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판단해 우선 49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판매를 중단키로 했다"고 말했다. 이 서점은 "49재가 끝난 이후에는 출판계와 '맑고 향기롭게'의 합의 내용을 따르겠다"고 덧붙였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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