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개혁안 관철을 위해 '조정(reconciliation)'이라고 불리는 미 의회의 독특한 제도를 이용할 태세다. 민주당 지도부가 이미 공화당에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하며 오바마 대통령은 의회 상황의 긴박성에 맞춰 호주, 인도네시아 등에 대한 순방까지 연기했다. 건보개혁안 처리를 둘러싼 미 민주, 공화당간 갈등과 대립이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1974년 도입된 조정 제도는 당초 예산에 관련된 법안의 시급한 처리를 위해서만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배제토록 하는 제한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즉 미 상원에서 통상 법안통과에 필요한 60표 대신 예산법안에 대해선 단순과반수 51표만으로 가결할 수 있도록 한 것. 그러나 이 예외적 장치는 곧 법안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다수당이 소수당의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건보개혁안 처리에 조정 절차를 동원할 수 있느냐를 둘러싼 미국내 논란은 뜨겁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확신에 차 있는 듯하다. 그는 최근 일련의 여론몰이 대중 연설에서 "(건보개혁안이) 옳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며 "그렇기에 의회가 법안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보험자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건보개혁 법안의 '진보성'에 대한 믿음이 수단의 정당화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건보개혁안이 진보적이라는 데에는 미국내에서 대체로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진보 성향의 뉴욕타임스는 건보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장문의 사설을 싣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 칼럼니스트가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필리버스터 등) 입법 제도의 존재 자체가 엄청난 진보적 승리임을 잊고 있다"고한 지적에도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 있다. 다수당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고안된 필리버스터의 역사적 진보성을 상기시키면서 진보적 목적을 위해 비진보적 편법에 기대려는 시도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건보개혁의 진보성은 '급진적'이어서 오바마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근거가 된다. 때로 저급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까스로 미국의 건보개혁 현안이 진보 대 보수의 정책적 논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세종시 논란은 어떤가. 원안 고수냐 수정안 추구냐에 따라 갈라진 정파들의 면면을 보면 세종시를 둘러싼 갈등의 성격이 보다 명확해진다.
수정안 지지세력은 이른바 한나라당내'친이명박계' 뿐이고 '친박근혜계'와 다른 야당들은 원안 고수 일색이다. 거기엔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없다. 논란 과정에서 정파들의 이념이나 노선, 색깔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정책적 진지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원안고수 세력들의 결과적 연대를 뚜렷한 정치적 동질성으로 묶어낼 수도 없다. 지역 정서에 버무려진 권력게임이라는 속성만이 세종시 싸움판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세종시 논란은 이제 정책적 관점이 실종된 상태에서 절차를 둘러싼 대립으로 전락하고 있다. 한나라당 당론으로 채택하느냐 마느냐, 당론으로 결정되면 친박계가 국회표결 때 반대할 수 있느냐 없느냐, 국민투표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 절차에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으니 세종시 앞날은 암담하기만 하다. 정당과 정파, 그리고 정치가 스스로 왜소해지고 무시당해도 좋을 길로 가고 있다.
고태성 국제부장 tsg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