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의전은 당사국 간의 역학관계를 반영한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9차례 파견됐던 조선의 통신사를 영접하는 일본 측의 의전 변천을 보면 그 역학이 확연히 드러난다. 동아시아의 문화종주국임을 자부하던 조선과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일본 사이에 벌어진 파워게임의 양상이 적나라하다.
차(茶)문화 연구자인 박정희(53)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외래교수는 저서 <17~18세기 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의식다례>(민속원 발행)에서 조선 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외교의례 변천 과정을 분석했다. '의식다례(儀式茶禮)'란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공식적인 의식을 의미한다. 조선의 대중국 외교와 비교하면 대일 외교 자료는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조선 통역관의 가이드북 역할을 했던 '통문관지'(1720)와 '증정교린지'(1802), 일본측 자료인 '대마종가문서' 등을 꼼꼼히 살폈다.
박 교수는 "임진왜란 직후까지도 일본은 단순히 교린 관계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을 공대했지만 점차 동등한 예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조선보다 우위에 서고자 했다"고 분석한다. 조선 통신사의 사행은 쓰시마섬에서 시작해 교토, 에도(도쿄)로 이어졌는데, 박 교수는 사행을 맞이하는 쓰시마 도주들의 영접 위치의 변천에 주목해 이런 결론을 끌어냈다. 예컨대 1607년 통신사들이 임진왜란 후 처음으로 사행을 재개했을 때만해도 도주들은 연회가 열리는 누각 밖 중문까지 나와 사신들을 영접했지만, 점차 섬돌 위(1617년, 1624년), 섬돌 아래(1636년), 계단 위(1655년), 대청 위(1682년 이후)로 영접 위치가 변하는 등 오만해졌다.
의전 중 가장 중요한 절차인 서계(書契ㆍ국서) 전달과정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비례(非禮)가 두드러졌다. 1607년에는 도주가 와서 먼저 첫 인사를 하면 통신사들이 서계를 전달했지만, 이후에는 수석통역관이 도주의 집으로 가 서계를 전달하는 식(1636년)으로 변했다. 통역관이 서계를 전달하면 당일 또는 다음날 도주 일행이 감사인사를 했으나 18세기에 이르면 7~10일이 지나서야 도주가 인사를 하러 올 정도가 됐다.
박 교수는 "초기에 조선 통신사들은 일본 측의 결례에 대해 꾸지람을 했지만 나중에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순응하게 된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현상은 병자호란을 겪은 뒤 청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조선이 일본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점, 이같은 조선의 처지를 이용해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일본의 외교적 계산이 맞물려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통신사의 위상에 대해서도 "당시 에도 막부는 조선 통신사를 류큐(오키나와)의 조공 행렬과 동렬로 놓으려 하는 등 조공국의 신하 개념으로 보려고 한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원래 박 교수는 외교사가 아닌 풍속사 연구자. 차문화가 일본만큼 승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왜 통신사들의 국서 전달 의식을 '서계다례(書契茶禮)'라고 표현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 외교관계 전역으로 관심을 확장했다고 한다. 그는 "행차(行茶) 등 겉으로 보여지는 점에 집중됐던 기존의 다도 연구에서 나아가 다도 문화를 역사, 철학, 산업적 맥락과 연관시켜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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