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A은행 부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이모(44·여)씨는 옷을 벗었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취직한 지 20여년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닥친 명예퇴직 압박을 견디지 못한 결과였다. 이씨는 "어차피 상고 출신 여행원이 지점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며 "위·아래에서 무언의 퇴직 압력이 거세 어쩔 수 없이 명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 1년 반. 가뜩이나 벌어져 있던 남녀 간 고용 격차가 더욱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극심한 고용 침체 속에서 '힘 없는 절반' 여성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18일 기획재정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남성 취업자는 1,348만3,000명으로 작년 같은 달에 비해 11만6,000명,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인 재작년 같은 달에 비해서는 11만4,000명 증가했다. 지난달 고용부진 속에서도 전체 취업자 수가 비교적 큰 폭(12만5,000명)으로 증가한 데는 남성 취업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셈이다.
반면, 여성 취업자는 938만4,000명으로 작년 같은 달에 비해 고작 9,000명 증가하는데 그쳤고, 특히 재작년 같은 달과 비교해서는 오히려 13만1,000명 감소했다. 2년 동안 15세 이상 여성 인구가 45만8,000명이나 늘어난 걸 감안하면 피부로 느끼는 취업자 감소폭은 이보다 훨씬 더 컸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15세 이상 인구 중에서 취업자 비율을 보여주는 고용률이 남성은 2년 전 69.5%에서 지난달 68.2%로 1.3%포인트 낮아지는데 그쳤지만, 여성은47.1%에서 45.4%로 1.7%포인트 추락했다. 위기 전후 남녀 고용률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창 일할 나이의 취업자 수 감소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20~40대 여성의 취업자수는 지난 2년간 31만2,000명이나 감소했다. 그나마 여성의 일자리는 50~60대 노년층 일자리만 근근이 창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다른 고용지표도 여성의 악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실업자의 경우 여성은 2년 전 28만3,000명에서 지난달 45만9,000명으로 62% 폭증한 반면, 남성은 이 기간 53만6,000명에서 70만9,000명으로 32%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에 따라 실업률도 여성은 2년 전 2.9%에서 4.7%로 1.8%포인트 높아졌지만, 남성은 3.9%에서 5.0%로 1.1%포인트 상승하는데 그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예 일자리 찾기를 포기하고 집안살림이나 학업 등으로 방향을 전환해 비경제활동인구로 편입된 인구도 여성이 남성의 2배에 육박한다. 여성의 비경제활동 인구는 2년새 41만1,000명 늘어난 반면, 남성은 24만9,000명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처럼 여성고용사정이 악화되는 이유는 경제상황이 어려워지자, 기업들이 여성인력채용을 더욱 기피하고 있기 때문. 출산·육아에 대한 애로와 사회적 배려부족,' 유리천정(진급장벽)'등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여성고용의 질이 낮은
데, 경제위기가 닥치자 그 피해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 고용 질 개선이라는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런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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