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부터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에 녹아든 가슴 아픈 상처"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대학 입학식 날부터 입기 시작한 감색 교복에 먼지가 채 묻기도 전, 개강 둘째 주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9시 제1교시 권중휘 교수의 현대 영문 단편소설 강독 시간이었다. 강의가 시작된 지 몇 분이 채 지나기 전에 강의실 밖 교정에서 울부짖는 고함소리가 교수님의 목소리를 압도하며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모여라, 학우들이여, 규탄한다 3ㆍ15부정선거."
강의실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학생들이 책가방을 들고 하나 둘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금세 강의실은 웅성거리는 장바닥 같이 되고 말았다. 나도 운동장으로 나가 이미 대열로 늘어선 줄에 끼어들었다.
3ㆍ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정에 대열로 가득 늘어선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대열이 옛 동숭동 서울대 교문을 박차고 나가 이화동 네거리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기마경찰대가 진행을 막고 버티고 서있었다. 기마경찰대의 저지선을 뚫고 앞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기마경찰대 간의 일대 격돌이 벌어졌다. 많은 학생들이 경찰의 곤봉에 맞아 쓰러지며 말발굽에 채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리 저리로 빠져나와 세종로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 두 시간 후에는 서울 이곳저곳에 있는 대학교들로부터 모여든 대학생들이 세종로 네거리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드디어 당시의 이승만 정부와 학생들 사이에 정면승부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최고 권부였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향해 통의동 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발대가 경무대 근처에까지 진입했을 때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발은 엄포사격, 그 다음부터는 키 높이로 발사가 계속되었다. '탕 탕 탕'. 바싹 땅에 엎드리지 않으면 피투성이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살고자 하는 자는 길거리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금세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피 흘리는 학생들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 행렬은 퇴각하여 세종로 일대를 비롯하여 종로와 을지로, 남대문로, 서울역 등으로 퍼져 나갔다. 서울 시내는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지금부터 50년 전에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의 풍경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며칠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후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종지부를 찍었다. 4ㆍ19 학생혁명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민주화운동의 첫 단추가 이렇게 꿰어졌다. 이후 민주당 정권이 그 싹이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5ㆍ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단명하고 나서 등장한 박정희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기나긴 민주화운동의 고난의 행군이 1987년 이른바 6월항쟁으로 종착되기까지 이어졌다.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한국의 최현대사에 녹아들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짧은 시간 안에 달성한 나라라고 우리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우리 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 위에는 성숙한 민주화가 안착되지 못했다.
87년 6월항쟁으로 거친 군사통치는 종지부를 찍었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는 민주화 투쟁 과정이 남긴 깊은 상처의 후유증에 시달려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의 본령은 저항과 데모의 기지라는 것이 대학생의 인식세계를 점령하고 있었다. 대학의 본령은 모름지기 진리의 전당으로서 창조의 기지가 되어야 마땅하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은 차츰 기존 군사통치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면서 반 대한민국 세력에 대한 동조적 경향이 짙어갔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 전두환 군사세력의 집권으로 인하여 크게 촉발되었다. 이렇게 민주화운동이 반독재 저항운동이라는 본래의 궤도로부터 점차 이탈해 갔다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가장 두드러진 이데올로기적 혼란과 반목에 시달렸던 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른바 '386세대'라는 별명을 지닌 세대의 출현이 바로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우리가 50년 전 4ㆍ19 학생혁명이라는 민주화 대장정을 떠난 이후 이 땅의 바깥세상은 엄청난 역사적 격변을 겪었다. 자본주의 세계와 공산주의 세계 사이의 냉전체제가 무너졌으며,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로 세계가 하나의 삶의 둥지로 변화되어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격심한 변화와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제 문資?대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치른 온갖 고초 덕분에 입에 풀칠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최빈국의 비참으로부터 벗어나 남을 도와줄 수 있는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자그마한 행운의 기쁨에 사로잡혀 우리 앞에 직면한 문명의 도전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적절한 대응전략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류의 새 문명에서도 변방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새 문명은 새로운 사고의 틀과 새로운 제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철학을 요구한다. 우리가 그동안 심취해왔던 이데올로기적 발상은 근대 이후 탄생한 산업문명의 틀 안에서 발생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접근법이었다. 이 때 제안되었던 좋은 처방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좋은 생각이 될 수 없다. 그 때의 '문제상황'들이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문제상황들을 형성한다. 따라서 새로운 생각의 틀로 접근해야 풀릴 수 있다. 신문명은 신문법을 통해서 접근할 때 살 길이 열린다. 어제 유효했던 처방들을 우리는 이제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한다. 새로운 생각의 틀을 창안하여 새 문제상황들에 대처할 때 살 길이 열린다.
지금 지구 위에 그 어느 누구도 새로운 문명에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소유한 자는 없다. 그래서 지금 세계인들은 엎치락뒤치락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류 역사에 나타나는 과도기의 모습이다. 과도기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들끓었던 역사적 기록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과 같은 과도기에 최선의 지혜는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상황에 대한 심층적 통찰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문제상황에 접근해 가는 일이다. 이미 시효가 지난 낡은 처방에 매달리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금지 조항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대한민국은 아직도 지나간 문명 속의 이데올로기 논쟁의 유행가를 부르며 세상을 구원할 듯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다. 특히 정치의 세계를 주름잡는다는 사람들 사이에 아직도 지나간 문명의 꿈 속에서 헤매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낡은 꿈에서 깨어나시오". 이것이 그런 분들을 위한 오늘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길거리에서 고함소리 지르기'로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길거리 민주주의자들은 더 이상 새 문명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도할 자격이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역과 연고의 끈을 잡고 감언이설로 세상을 끌고 가려는 낡은 인간들이 적어도 정치의 전면에서 사라져야 진정한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살아 숨쉴 수 있다.
군사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대항하던 구태의 모습으로 토론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속을 넘나드는 것을 일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이 땅은 50년 전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그 때모다 무엇이 더 진보했다고 큰소리 칠 수 있을까?
오늘 입 가진 사람들은 말한다. 김연아 같은 우리의 새로운 일꾼들은 대한민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 올리는데, 대한민국을 계속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사람들은 누구냐고? 바로 여의도 근처를 방황하는 정치꾼들이 아니냐고?
50년 전 4ㆍ19를 회상하면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 현주소를 더듬어보는 4ㆍ19세대의 넋두리를 끝낸다.
■ 이명현 교수 약력
▦1942년 평북 신의주 출생 ▦1964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73년 미 브라운대 박사 ▦1977~2007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 ▦1997~98년 교육부 장관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 조직위원장 ▦저서 <열린 마음 열린 세상> <길 아닌 것이 길이다> <이성과 언어> <신문법 서설> 등 ▦현 서울대 명예교수, 심경문화재단 이사장,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공동 상임대표 신문법> 이성과> 길> 열린>
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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