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부를 하면서 들어본 가장 황당한 말은 '역사는 고정불변이며 따라서 암기과목'이라는 말이다. 아마 연대, 인명, 지명 등 외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나오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수학도 암기과목이다. 구구단부터 시작해서 외워야 할 정리와 공식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농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학도 역사도 암기과목이 아니다.
영속적 가치 분별하는 안목
과거는 불변이다. 하지만 그걸 인식하는 사람의 '눈'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러니 시대마다 새롭게 역사를 써야 한다. 예를 들면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역사학은 철저히 정치사 위주였다. 왕, 귀족, 장군이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과 더불어 역사의 경제적 국면이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사회경제사가 '탄생'했다.
20세기에는 더욱 눈부신 변화가 있었다. 1960년대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흑인 민권 운동과 여권 운동 때문에 과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등장했다. 기존의 역사 연구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던 흑인 노예사와 여성사가 새롭게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종종 뒤바뀐다. 유럽사에서 17세기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은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전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히 싸우던 이 시대는 또한 과학자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을까? 당연히 30년 전쟁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평가는 압도적으로 갈릴레이에게 더 큰 비중을 둔다.
꽤 오래 전 일이다. 철도청에서 추억관광 상품으로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려 했으나 국내에 한 대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중국에서 중고 기관차를 수입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디젤과 전기 열차가 일반화한 요즘에는 증기기관차가 아련한 옛 시절을 일깨워주는 추억상품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던 19세기 유럽의 문인들에게 시커먼 연기를 뿜고 괴성을 지르며 들판을 가로지르는 증기기관차는 '녹색의 정원'에 난입한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같은 사물에 대한 관점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현대국가 상당수가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공화주의'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미국에서 공화당은 보수 정당에 속한다. 하지만 왕권신수설이 공공연히 주장되던 17세기 유럽에서 공화주의란 국왕 살해를 획책하던 반역자들의 급진 과격사상이었다. 왕이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되던 그 시절에 공화주의는 끔찍한 신성모독이기도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전통적 관념은 사회보장제도의 등장으로 옛 말이 됐다. 18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민주주의란 '폭도 지배(mob-rule)'와 동의어였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이후 2,000년 넘도록 경멸적인 용어였던 민주주의는 바야흐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정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급진 사상이었던 공산주의가 소련 멸망 후 보수 이념으로 전락한 것은 역사의 얄궂은 아이러니다.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아닐 수 없다.
국사ㆍ세계사 홀대하는 교육
역사 공부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가 종종 엇갈린다는 것을 배운다. 이를 통해 영속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안목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발표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필수였던 국사과목이 선택으로 변경됐다. 오죽하면 개그맨 장동혁이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에서 "국사가 무슨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이야?"라고 빈정댈 정도다. 국사가 찬밥 취급이라면, 세계사는 아예 쉰 밥 취급이다.
혹시 이런 정책 결정의 배후에 우리 국민의 눈이 밝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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