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계(鵝溪) 이산해는 재주 있기로 유명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이색의 후손은 혈통의 DNA 때문인지 문장에 능한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도 이산해는 특출했다.
이산해는 탄생부터가 신이(神異)하다. 이산해의 아버지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이 보령읍(寶寧邑) 서쪽 고만산(高巒山) 기슭에 선영(先塋)을 정하면서 "해년(亥年)이 되면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1539년(己亥)에 이산해가 태어나자,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산해는 예상한 대로 두 살 때부터 이미 글을 깨치기 시작했다. 이웃 상사(上舍)가 귤을 보여주자 "黃(황)"자로 대답하고, 농부가 쇠스랑을 들고 지나가자 "山(산)"자를 말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3살 때 유모(乳母)의 등 뒤에서 동해옹(東海翁)의 초서(草書)를 보고 손가락으로 그어서 휘둘러 쓰는 것처럼 했더니 먹이 번져 더러워졌다. 아버지가 돌아와 유모를 나무라자 이산해가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진본(眞本)과 비슷하게 썼다고 한다.
그리고 5살에 삼촌 이지함이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더니 천지와 음양의 이치를 깨달아 이를 논설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다. 이산해는 특히 글씨를 잘 썼다. 6살 때 이산해는 큰 붓을 잡고 비틀거리면서 글씨를 쓰고 먹 묻은 발로 낙관을 찍으니, 글씨 모양이 품위가 있고 기상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글을 받으러 줄을 이었다. 그리하여 장안에 서대문 자대필(子大筆)이라는 동요가 나돌기까지 했다. 이지번은 어려서 너무 이름이 날까 봐 이산해를 데리고 동작동 정자로 피해 있을 정도였다.
그 후 이산해는 11살 되던 1549년(명종 4)에 소과에 응시해 만초손부(滿招損賦) 110여구를 지어 장원으로 합격했다. 이 시는 과거 시험장에 있던 사람들이 돌려가면서 외웠다고 한다. 시관들은 이 글을 정말 어린 이산해가 지었을까를 의심해 다시 분송부(盆松賦)를 지어보라고 했더니 단숨에 지었다 한다. 고시관들도 그 시험지를 나누어 가지고 가서 보물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산해는 초기 당쟁시대에 태어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욕을 먹었다. 동인, 북인, 대북, 골북의 영수로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상대 당의 공격을 계속 받았고, 인조반정으로 그가 소속된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실리적 현실주의자로서 청렴하고 충직해 국왕의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당파의 영수로서 권력투쟁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산해 부자에게는 온갖 비난이 뒤따라 다니고, 죽은 뒤에 한 군데의 서원에도 배향되지 못했다. 신도비도 정조대에 남인재상인 채제공에 의해 겨우 세워질 정도였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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