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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7> 식민지 한국영화의 산실,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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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7> 식민지 한국영화의 산실, 단성사

입력
2010.03.1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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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2가 네거리의 영화관, 단성사.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한일 강제병합 3년 전인 1907년 지명근 등 한국인 3명의 발기로 설립됐으니 올해로 103년이 됐다.

그러나 지금 단성사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지상 9층, 지하 3층 건물로 다시 지어 10개 스크린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한 지 5년, 옛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위치와 이름만 그대로다. 예전, 특히 일제강점기 단성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1934년 개축 당시 쓰였던 빨간 벽돌 10여 장뿐이다.

당시 단성사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이 벽돌들은 5층과 7층 상영관 로비의 어두컴컴한 유리 진열장 안에, 그리고 9층 사무실 옆 골방 바닥에 놓여있다. 한국 현대사가 전쟁과 산업화 등을 겪으며 워낙 격변한 탓에 역사 자료를 제대로 보전하지 못한 것이 영화 분야만의 일은 아니지만, 착잡하다.

현재 단성사 건물에서 영화관으로 가는 통로는 어수선하다. 오른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귀금속 가게를 지나 상영관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 좁은 로비에 서서 천정을 올려다보면 둥근 반구형 벽화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1875?~1932)의 모습과 당시 단성사 건물이 그려져 있다. 박승필, 그는 오늘의 단성사가 있게 만든 주인공이다. 하지만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 천정을 올려다보는 이는 없다.

표지판 하나 없으니 거기 그림이 있는 줄도 대부분 모른다. 상영관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옆 벽화에도 한국 영화를 빛낸 많은 이들 가운데 그의 얼굴이 있지만, 그 또한 다들 모르고 지나친다.

일제강점기, 특히 박승필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 운영한 1918년부터 1932년까지 단성사는 식민지 조선 영화의 중심이자 초기 한국영화의 산실이었다. 한국 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의리적 구토'(1919), 첫 무성영화 '월하의 맹세'(1923), 일제강점기 영화의 최대 히트작인 나운규의 '아리랑'(1924), 첫 발성영화 '춘향전'(1935)이 모두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의리적 구토'는 연극을 하다가 필요한 몇몇 장면을 영화 영상으로 처리하는 이른바 '연쇄극'의 첫 작품으로, 박승필이 제작비를 대서 만들었다. 이 영화가 개봉한 1919년 10월 7일은 '영화의 날'로 지정됐다. 나운규의 '아리랑' 이후 1930년대까지 무성영화 황금기의 영화는 전부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일제강점기 영화 흥행의 귀재였던 박승필은 한국영화 초창기의 개척자다. 흥행사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08년 구극(판소리, 창극 등) 전용 극장 광무대 운영을 맡으면서부터다. 단성사도 주로 구극을 하던 곳이었는데, 그가 일본인으로부터 단성사 운영권을 인수한 1908년 개축해 12월 재개관하면서 영화전용관으로 바뀌었다.

광무대와 단성사를 나란히 운영하면서 흥행의 실력자로 떠오른 그는 한국영화 제작과 지원에 나선다. 김도산 감독과 손잡고 '의리적 구토'에 이어 '시우정' '형사고심' 등 연쇄극을 잇달아 제작했고, 단성사 안에 촬영부를 설치해 '장화홍련전'(1924)을 만들었다.

'장화홍련전'은 제작과 연기를 모두 한국인이 맡은 첫 영화다. 나규가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만들자 재정적 후원을 한 것도 그였다.

그가 단성사를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 경성고등연예관, 장안사, 연흥사 등 서울의 영화관은 죄다 일본인 소유였다. 그는 당시 서울 종로의 황금관과 우미관이 양분하고 있던 조선인 관객을 단성사로 끌어들여 단성사 전성시대를 열었다.

1922년 조선인이 주로 드나드는 또다른 극장으로 조선극장이 문을 열었지만, 단성사의 절대 우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1932년 박승필이 사망하면서, 단성사는 쇠락의 길을 걸어 1939년 일본인에게 넘어간다.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이듬해에야 본래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른다.

해방 후 단성사는 '역도산'(1966),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등 당대 최고 히트작들의 개봉관으로서 빛나는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 이 극장의 영화는 거의 사라졌다.

단성사와 더불어 1910~20년대 조선인들이 들락거리던 종로의 다른 두 극장, 우미관과 조선극장도 지금은 터만 남았다. 우미관 터는 종로2가 맥도널드 옆 골목, 삼겹살집 앞에 표지석이 서 있다.

옆 건물에 들어선, 하루 숙박비 2만원 받는 여관 '우미관 호텔'만이 이 자리와 이름을 기억할 뿐,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은 표지석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조선극장 터는 탑골공원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길목의 소공원, 인사문화마당의 대나무 숲 앞에 표지석을 박아 놨다.

현재 종로 1~4가에는 단성사를 비롯해 단성사 맞은편 피카디리, 시네코아, 서울극장, 허리우드클래식 등의 영화관이 있다. 낡은 극장 허리우드클래식 말고는 전부 멀티플렉스 극장이다. 우리에게 100년 전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 일제의 영화정책

일제는 한일 강제병합 이전부터 식민 통치에 영화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1907년 볼모 신세로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에 관한 영화가 대표적이다.

양국 친선을 도모한다는 일제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영친왕의 신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일제는 영친왕의 도일 장면을 영화로 제작, 이듬해 창덕궁에서 고종과 순종 앞에서 상영했다.

일본에서 영친왕이 환대를 받았다고 보여주는 장면들로 채워진 영화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을 일본 전역으로 끌고 다니며 한일 융화ㆍ융합과 한국 황태자의 유학, 동양의 평화 등을 주제로 강연했고 그 내용을 필름에 담아 조선 전역에서 상영하게 했다. 일본의 풍속, 자연경관, 대규모 군사훈련 장면도 함께 상영해 선전에 이용했다.

조선총독부가 영화를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3ㆍ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부터다. 일제는 1920년 조선총독부 안에 활동사진반을 설치하여 '조선사정' '조선여행'을 제작해서 일본 국내에서 상영하였다.

3ㆍ1운동으로 일본에서 조선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이를 해소하고 조선이 안정돼 있다고 보여주는 선전 수단이었다.

또한 조선 각지의 군수와 교원들로 이뤄진 일본시찰단을 따라다니며 '내지(內地) 사정'이란 영화를 제작, 일본 각지의 풍물과 재일 조선인의 활동상 등을 조선에 소개했다.

조선총독부 활동사진반의 영화 제작과 전국 상영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8년 통계에 의하면 활동사진반이 만들어서 전국에서 순회 상영한 영화는 295종이나 된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영화정책은 전쟁 동원을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과 궤도를 같이한다. 전시 물자 부족으로 인하여 필름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일본은 조선 내 영화 제작을 중단시켰지만, 총독부는 조선인의 황민화에 영화가 꼭 필요하다며 제작을 고집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영화의 주제는 육해군 지원제와 징병제, 물자 동원, 내선일체에 의한 황국 신민화 등에 맞춰졌다. 지원병 선전 영화인 '그대와 나'(1941), '젊은 모습'(1943), 황민화를 소재로 한 '집 없는 천사'(1941), 해군특별공격대 지원제를 선전하는 '사랑과 맹세'(1945), '가미카제의 아이들'(1945) 등이 대표적이다.

■ 1935년 개관 전국 유일 단관 '광주극장'

광주광역시 충장로 5가. 주단가게와 귀금속가게가 늘어선 이곳 골목에 75년 된 오래된 영화관이 숨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문을 연 광주극장이다.

현재 극장 건물은 1968년 불이 나서 다시 지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관이다. 극장들이 대부분 멀티플렉스로 바뀐 지금도 이 극장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스크린이 하나뿐인 단관 상영관이다.

한때 광주지역 상권의 중심이었던 이 일대는 지금은 젊은이들로 붐비는 바로 옆 충장로 1~3가와 달리 나이 든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가라앉고 퇴락한 곳이 되었다.

극장 정면에는 예전 상영작을 그린 간판이 걸려 있다. 요즘 보기 드문 영화 간판에 끌려 들어온 촌로들은 "아직도 있당가? 하긴 하능가?"라며 반가워한다. 극장 내부는 세월의 흔적이 더 뚜렷하다.

1층 중앙 출입문에는 '임검석'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순사가 그 문으로 들어가 검열을 하다 비위에 거슬리면 호루라기를 불던 임검석 여섯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2층에는 50년도 더 된 영사기와 이 극장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영화 포스터 등을 전시해 놓았다.

광주극장은 광주 지역에서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문화예술법인 1호다. 이 지역 유지로 육영사업도 하던 만석꾼 최선진(그의 호 '유은'을 딴 유은학원 설립자)이 죄다 일본인 소유 극장뿐이던 그때 조선인을 위한 극장으로 설립했다. 현재 사장은 설립자의 증손자다.

이 극장이 개관한 1935년 10월 1일은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한 날이다. 광주부 인구가 5만명이 조금 넘던 그때 1,250명을 수용하는 광주극장이 등장하자 신문들은 '조선 최대'라고 대서특필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 극장이라곤 서울 단성사, 함흥 동명극장과 명보극장, 진남포 항좌극장, 목포의 목포극장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광주극장은 영화 상영 외에 창극 연극 등 공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여기서 강연을 하는 등 집회나 행사장으로도 많이 쓰였다.

2002년부터 예술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 극장은 손님이 별로 없다. 1, 2층 840석의 큰 극장인데 한 회 상영에 손님이 네댓 명밖에 안 될 때가 많다. 한 층에 한 명뿐일 때도 있다. 수지타산만 따지면 진작 문을 닫아야 했겠지만, 이 지역 영화사의 산 증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30년째 이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내년이면 칠순이라는 청소부 아주머니는 "쓰레기 많아도 좋으니 제발 사람 드는 영화 좀 하자"고 성화라고 한다. 최근에 한 번 대박이 난 적이 있긴 하다. 지난해 '워낭소리'를 개봉했을 때다.

매회 800석 이상이 차서 극장 밖으로 긴 줄이 섰다. 김형수 광주극장 이사는 당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촌로들이 "워매, 사람 많네. 이래 많이 오긴 처음이여. 장관이네 장관이여"라며 내 일처럼 기뻐했다고 말했다.

극장 안은 춥다. 난방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1층 로비에 담요가 여러 장 쌓여 있다. 손님들은 담요로 몸을 덮고 영화를 본다. 낡고 썰렁하지만, 거의 텅 빈 극장을 혼자 전세내다시피 해서 시네마 천국에 빠져드는 행복은, 다른 데선 맛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극장을 흘러간 추억이나 보호해야 될 유물처럼 보는 시선이 김형수 이사는 마뜩치 않다. 그는 "멀티플렉스도 있고 단관도 있고, 그런 다양성이 살아있어야 좋은 것 아니냐"며 "광주극장은 한국영화 의무 상영 일수를 못 채워 영업정지를 당한 적 몇 번을 빼곤 70여년 간 하루도 안 쉬고 영화를 상영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광주극장은 최근 미술작가 초청 워크숍, 영화감독과의 대화 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열고 학생 단체 관객을 유치하는 등 극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 글ㆍ사진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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