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걸스카우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걸스카우트

입력
2010.03.15 23:05
0 0

겨울이 가고 봄이 왔어요

엄마

구름은 젖은 그늘을 만들며 흘러가고 야영지는 낯선 별들로 가득했지요

어린 소녀들은 저마다 머리카락을 풀어 숲의 그늘을 더듬고 깊은 산의 골짜기는 한없는 그늘 속으로 사라졌어요

엄마

야영지의 설레는 첫 번째 잠이에요

수액이 된 흰 눈이 저마다 서글픈

꽃잎을 길어 올리는 소리가 들리는 밤이에요

산은 깊고, 거대한 소문처럼

숲의 어둠은 은밀하고 매혹적이었어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구름이 만든 그늘을 따라 입산했고요

골짜기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 몇몇은

새학기가 다가와도 하산하지 않았어요

야영지의 밤은 깊어만 가고, 사라진 소녀들은 쉽게 잊혔어요

봉우리마다 옮겨 붙은 불길은

환하게 야영지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요

소녀들은 불길 속의,

놀랍도록 늙어버린 엄마들을 바라보며 경악했어요

불길 속의 엄마들은 비명을 지르며

소녀들을 향해 맹렬히 쏟아졌어요

소녀들의 온몸을 관통해,

생을 다한 별자리가 사라지고 있군요

야영지의 밤은 잊을래요

돌아오지 않는 소녀들의 이야기도 잊을래요

엄마의 이야기가 밤새도록 들려오는,

놀랍도록 무서운

야영지의 밤이니까요

놀랍도록 두려운

나는 아직 걸스카우트니까요

●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무엇인가에 정신을 쏟고 나면 겨울이었다가 봄이에요. 하얀 눈 위로 노랗고 붉은 꽃잎들이 마구 떨어지는 느낌이지요. 법정 스님 입적하시고 스님의 책을 처음 읽던 십대 후반의 나날들이 떠올랐어요. 인생은 꿈, 그런 따위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꿈이라면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길었고, 때로는 잊지 못할 정도로 달콤했던 꿈이었으니까요. 그렇긴 해도 소년이었던 내가 언제 아버지가 된 것인지 불가사의할 때가 있어요. 어느 밤에 불길이라도 타올랐고, 그 다음날부터 내가 아버지가 된 것이라면 이해하기 쉬울 텐데. 걸스카우트라고 말하면 애잔한 마음이 드는 이유를 걸스카우트 단원들은 절대 모르겠죠.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