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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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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봄맞이

입력
2010.03.1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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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월초에 내린 비에 잠시 봄이 왔다고 속았지만 이번에는 진짜다. 그제 밤 일부러 비를 맞았다. 얇은 티셔츠 하나를 걸쳤을 뿐인데도 춥지 않았다. 도시에 내리는 비가 맑을 리 없고, 황사 기미도 있었지만 기분이 그지없이 상쾌했다. 완연한 봄비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문득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렸던 이수복의 시 <봄비> 의 첫 구절을 떠 올렸다. '비 그치니 긴 둑에 풀빛이 짙다(雨歇長堤草色多)'던 고려 시인 정지상의 <송인(送人)> 도 저절로 함께 떠올랐다.

■ 둘 다 이별을 노래한 시인데 아무런 비감이 들지 않았다. 가사로는 외로움과 서글픔이 가득한 박인수의 노래 <봄비> 를 흥얼거려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비가를 읊조리면서도 가슴은 봄비가 실어 나르는 희망을 좇고 있었기 때문일까. 비안개로 희뿌얘진 가로등 사이로 벚나무 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꽃눈은 벌써 탱탱하게 부풀었다. 악착같이 가지에 붙었던 플라타너스 잎도 새 잎눈에 자리를 비켜주고 떨어졌다. 누렇게 마른 수크령 덤불 속에서 한겨울을 나고 젖을 뗀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 없이도 저희끼리 풀숲을 나와 쉴 새 없이 장난을 쳤다.

■ 겨우내 집처럼 드나든 병원 정원이 봄비 속에 펼쳐 보인 밤은 아늑했다. 지난 겨울은 추웠다. 병실 창 너머 한강은 얼어붙어, 오랫동안 눈에 덮여 있었다. 강바람이 눈보라를 피워 올리는 스산한 풍경에 마음을 기댔다가는 힘겹게 병마와 싸우는 아내에 앞서 스스로의 기력이 빠져 무너질 만했다. 그러나 고개 돌리면 봄은 늘 거기 있었다. 주위의 끊임없는 관심은 따뜻했고, 살아 있음의 고마움은 나날이 새로웠다. 병원 로비에 놓인 대형 화분도 봄을 날랐다. 잘려 옮겨진 개나리와 산당화, 설유화 가지에는 순식간에 노랑ㆍ분홍ㆍ흰색 꽃이 가득 피었다.

■ 그 꽃들을 지팡이 삼아 남쪽에서 올라올 꽃 소식을 기다리고, 봄날의 한가로운 여행을 꿈꾸었다. 남도에서는 매화가 피고, 산수유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마음은 벌써 벚꽃 길과 철쭉 밭을 달린다. 아직 한 차례는 더 추위가 찾아온다는 기상청 예보는, 어차피 제풀에 꺾이고 말 꽃샘추위라고 흘려 듣는다. 대신 겨울 가고 봄 오듯 삶도 고비를 넘으면 봄날이라는 믿음을 챙긴다. 다만 계절처럼 때 되면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희망의 싹을 키우고 있어야 맞을 수 있는 봄이다. 올 봄은 저마다 희망의 싹을 땅에 꽂는 것으로 맞자.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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