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았다가 일어서는 일처럼 사소하고 쉬운 일도 없다. 하지만 모든 물체를 지표면으로 잡아당기는 중력의 힘에 저항하며 똑 바로 서있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헤겔은 "선다는 것은 곧 의지의 작용"이라고 하였다. 쓰러지기는 쉽지만 일어서려면 의지, 즉 정신의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릴 때 골목길을 달리다가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릎에는 지금도 그 때의 상처들이 남아있다. 아기는 태어나서 걸음마를 하고 제대로 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무릎에 남아있는 상처들은 직립하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가 되기 위해 거쳤던 훈련의 영광된 흔적들이다.
철학자 셸링은 "인간 육체의 의미는 그 폭보다는 높이에 있다"고 했다. 직립하는 인간의 자세는 상승하려는 수직 방향의 정신적 의미를 내포한다. 중세 유럽인들은 잠을 잘 때도 수평으로 길게 눕는 것을 경계했다. 프랑스 르와르 강변과 파리 주변의 고성(古城) 들을 여행하다 보면 왕이나 봉건영주의 침대 길이가 매우 짧은 것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중세 유럽인이 키가 작았다고 하지만 150cm도 안 되는 침대에 편히 누울 수는 없다. 길게 눕는 것을 죽음과 동일시한 중세인들
은 짧은 침대에 상체를 비스듬히 세운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했다.
모든 예술은 고유한 특징과 표현의 장단점을 갖지만 조각 예술이 특히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탁월한 점은 바로 직립인간의 수직적 정신을 모방하고 표현하려 한다는 점이다. 중력에 저항하며 수직으로 우뚝 서있는 조각의 초월성은 어떤 예술로도 대체 할 수 없는 조작 특유의 표현력을 잘 보여준다.
종교에서 일어섬은 여러 가지 기적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드라마 <추노> 에는 전남 운주사의 와불(臥佛)이 등장한다. 통일신라 말, 도선 국사가 국운을 열려고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세웠는데 새벽이 되어 닭이 우는 바람에 불상 한 쌍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미완으로 끝난 '누워있는 미륵'이 언젠가 일어서는 날, 세상이 바뀌고 천년 태평성대의 용화(龍華)세상이 올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추노>
신약에는 예수가 행한 여러 가지 기적이 기록되어있다. 예수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도 "살아나라"하지 않고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였다. 죽은 아이를 살리고 중풍환자와 나병환자를 고칠 때도 "일어나라"고 하였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일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기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 있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동계 장애인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 그리고 지난 달 한국을 방문했던 닉 부이치치도 그런 사람이다.
닉 부이치치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넘어져 있습니다. 나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습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 해 보이겠죠? 그러나 나는 백번이라도 일어나려고 노력 할 것입니다." 이윽고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에 턱을 올려놓고 몸을 둥글게 구부려서 일어섰다.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는 "직립하고 있는 것, 수직인 것은 모두 불꽃이다"고 했다. 가슴 속에 뜨거운 불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수직으로 설수 없다. 설사 그가 두 개의 발과 온전한 신체를 지녔다 할지라도 말이다. 닉 부이치치와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 그들은 불꽃이다.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면서도 일어서는 것을 버거워하는 사람들, 삶과 현실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직립 인간의 의지와 용기를 보여준다.
전강옥 조각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