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책에서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은 모든 공조직의 정책이나 행정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정부가 전쟁청 영화위원회에 재정 지원을 하면서도 영화 제작과정에 일절 간섭하지 않고 자율성을 주면서부터 확립된 원칙이다. 1세기 가까이 지나면서 이 원칙은 이제 민간을 대상으로 한 중앙ㆍ지방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과 행정 전반에 적용되고 있다.
무시 당한 문화예술 지원원칙
'팔 닿는 데까지만 간여한다','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팔 길이 원칙'은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중요하다.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방식은 ①공무원 조직에 의한 정책 집행 ②예술위원회ㆍ재단을 통한 정책 집행 ③정부가 간여하지 않는 시장지향형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오랫동안 ①의 상태였다가 ②로 넘어온 한국이 ③으로 이행할지,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②의 단계에서 정부의 팔 역할을 하는 기구가 문화예술위원회다.
그런 문화예술위원회가 한국작가회의에 대해 요구했던 '시위불참 확인서'
제출을 50일 만인 10일 공식 철회한 사건은 문화행정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예진흥기금 3,400만원 지원을 조건으로 문화예술인들의 양식과 양심을 '정부의 팔'에 맡기라고 한 셈이니 "돈으로 예술을 길들이려 는 오만한 순치(馴致)정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의 위원장이 2명인 기묘한 상황에서 빚어진 일이어서 파장은 더욱 컸다.
위원회의 사과와 철회에도 불구하고 작가회의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기금을 받아 발행하던 계간지를 정간하고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하는 한편 계간지에 실으려 했던 작품을 거리에서 낭독하겠다니 '시위불참 확인서'가'시위 종용서'가 된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회의에 보낸 철회공문과 달리, 위원회가 기금 지원을 집행하는 전국 10개 시ㆍ도 문화재단에는 "적절히 판단해 해당 사업을 추진하라"는 공문을 보낸 것도 의심을 사고 있다. 그 의심이 정당한지 지나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민단체 지원금 차별 집행과 잘못된 문화정책 시정이 요구사항이니 저항의 글쓰기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나 재단을 통한 문화 지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명시적ㆍ묵시적으로 지원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돈을 주었으니 그 정부와 기구의 이념에 맞는'물건'을 만들어내게 하거나, 최소한 반대되는 물건을 만들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라는 식이다. 그런 요구의 실현을 위해 정부는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들을 위원회나 재단의 책임자ㆍ간부로 고르기 마련이다. 이제 출범 1년을 갓 넘긴 부산문화재단이 이사진 구성 단계에서 심한 진통을 겪었던 것도 인선 문제 때문이었다.
게다가 위원회나 재단은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권력화하고 관료화하는 속성이 있다. 요즘의 한국처럼 진영(陣營)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권력화ㆍ관료화 경향은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정부 지원금의 배분을 결정하는 것은 각 부문 예술인들로 구성된 위원들인데, 문화적ㆍ사회적 필요와 취향보다는 위원들의 기호에 의해 지원 대상을 선정할 우려도 크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화예술인에 대한 존중과 경의다. 정부든 공적 기관이든 기업이든 돈을 주는 측은 문화예술인들이 굴욕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경의와 존경의 바탕 위에서
이번 일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초대 문화예술위원장이었던 문학평론가 김병익 씨다. 5년 전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선언문과 함께 위원회를 이끌었던 그는 정부 대신 사재 3,400만원을 작가회의에 기부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게 아닌가 하는 초대 위원장으로서의 자괴감이 기부 동기였다고 한다. 그는 "문화예술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의와 존경의 바탕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말을 했다.
공조직은 필요 이상으로 팔을 뻗쳐 물건을 손에 쥐려는 충동을 자제하고 그런 행위를 삼가야 한다. 팔을 뻗쳐 손 안에 쥐는 것이 바로 장악(掌握) 아니던가.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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