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로 다니는 음식점 사장님이 김치를 주셨다. 전라남도가 고향인 사장님은 독에 묻었다 올라온 이번 김치가 나눠먹고 싶은 맛이라면서 따로 싸 주셨다. 김치 나눠 주시려고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거다. 그리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넉넉한 양의 김치를 주셨다.
우리 집에는 식구가 둘이다. 그러니까 김치를 아무리 자주 먹어도 남게 마련이다. 큰 통에 담긴 김치가 끄트머리로 갈수록 조금씩 시어질 때는 고등어에 넣고 찌거나 아니면 그냥 찌개를 끓인다. 이렇게 맛있는 김치를 두고 먹다 보면, 정말 김치가 놀라운 레시피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정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맛'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일단 김치는 배추 하나로 혀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식감을 보여준다. 잘 절인 배추로 김치를 담그면, 한 입 베어 물 때 짜르륵한 청량감을 느끼게 된다. 차가운 땅 속에서 머금은 미네랄이 배추를 씹을 때마다 쪽쪽 내뱉어지는 느낌이랄까. 평안도 사람들인 우리 친가 식구들은 늘 '사이다 같은' 맛의 배추김치를 최고로 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사이다 같이' 익은 하얀 배추김치만 썰어 오라 하시고는 안주 삼아 천천히 약주를 드시곤 했다.
배추의 청량함이 덜 해질 즈음이면 볶음으로 찜으로 찌개로 다양한 김치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또 미덕이다. 정말 며칠째 장을 못 봐서 집에 먹을 것이 쌀밖에 없을 때도 김치찌개 하나면 상이 훈훈해진다. 찌개를 끓일 때만큼은 시원한 맛의 이북김치보다 남도김치가 좋다. 이번에 선물 받은 남도김치처럼 간이 딱 배어 있지만 짜지 않은 김치를 얼렸던 돼지고기 몇 점이랑 파만 썰어 넣고 끓여도 맛이 난다. 여기에 두부가 있으면 두부를, 버섯이 있을 때는 버섯을 더한다. 정읍산 고운 고춧가루와 풋고추를 넣어 칼칼한 맛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 김장철에도 김치를 듬뿍 선물 받았었다. 아끼는 후배를 따라 쫄래쫄래 내려갔던 그녀의 외갓집은 담양이었는데, 마침 김장을 막 끝내신 외할머님이 김치를 그야말로 '퍼 담아' 주셨다. 김치를 담그려면 배추를 고르고 절이고, 속을 다지고 만들고, 다시 속을 채우고 물을 잡고 하는 일이 여간 공이 아닌데 처음 보는 서울 손님에게 선뜻 싸 주셨다. 한 포기라도 더 채워 주시려는 손길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또 넙죽 받고 말았다.
울 엄마가 어렸을 적만 해도 온 동네가 마당 있는 집에 모여 김치를 함께 담았고, 뭐라도 더 가진 집 주인은 덜 가진 아낙들에게 한 포기씩이라도 더 나눠 주려고 기분 좋은 실랑이를 벌였었다 한다. 이런 김장 문화는 주부들에게 큰 스트레스였지만, 김치를 담그는 날이면 내심 돼지고기라도 삶아서 맛을 보게 되나 하고 일찍 들어와 기다리던 아버지들과 아이들에게는 축제가 따로 없었을 터다.
각 지방마다 다른 맛, 익는 순서마다 각기 다른 맛, 다 익은 김치를 익혀서 먹는 또 다른 맛은 타 문화권에서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없는 맛이다. 내 주변에 맛있는 김치를 나눠주는 이웃들이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겠다. 그 분들이 주시는 김치를 먹고 감히 나도 한 통 돌려 드릴 수 있는 김장 솜씨를 어서 빨리 갖추고 싶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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