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 뒤에는 늘'사단(師團)'이란 말이 붙어 다녔다. 작곡가 박춘석이 없었다면 아직도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대형가수 패티 김도, 노래인생 50년을 넘긴'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도 없었을 것이다.
1970년대의 가요계 남성 쌍투마차인 남진과 나훈아, 독특한 창법과 개성의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의 곡으로 가수가 됐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신 분" "나를 스타에 이르게 한 분"이라는 그들의 고백이 결코 죽은 자에 대한 의례적이거나 과장된 추도가 아니다.
■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패티 김은 1959년 박춘석의 번안곡 <틸> (사랑의 맹세)로 이름을 알렸고, 3년 뒤 역시 그의 곡 <초우> 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다. 대표곡이 된 <못잊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시나무새>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도 그의 곡이다. 1964년 그를 만나 평생 콤비가 된 이미자도 <동백아가씨> (백영호 작곡)와 함께 자신의 3대 히트곡으로 꼽는 <섬마을 선생> <기러기아빠> 에서 30주년 기념음반 타이틀곡인 <노래는 나의 인생> 까지 무려 500곡을 불렀다. 남진에게 <가슴 아프게> 를 준 것도 그였다. 가슴> 노래는> 기러기아빠> 섬마을> 동백아가씨> 누가> 가시나무새> 가을을> 못잊어> 초우> 틸>
■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에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모습. 14일 타계한 작곡가 박춘석의 평생 이미지이다. 네 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연주해 '신동'소리를 들었고, 재즈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했던 그가 작곡가로 본격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스물 여섯 살 때인 1956년 <비 내리는 호남선> 을 발표하면서다. "나는 음악과 결혼했다"는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까지 한 달 평균 6곡씩 모두 2,700곡을 만들었다. 40년 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의 노래에 울고, 아파하고, 슬픔을 달랜 셈이다. 비>
■ 대중문화계에는 종종'사단'이 생겨난다. 방송작가 김수현씨도 사단을 거느리고 있다. 뛰어난 창작자와 그의 작품을 구현할 사람들의 비공식적 모임인 사단은 어느 한쪽의 강제나 희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술적 재능과 공감대는 물론 인간적 이해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코드'가 맞아야 한다. 그래야 작품이 살고, 사람도 산다. 작곡가와 방송작가는 가수와 연기자의 개성과 장점을 살려주고, 가수와 연기자는 창작자의 의도를 110%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박춘석 작곡, 패티 김ㆍ 이미자 노래의 수많은 히트곡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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