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체대 빙속 삼총사 이승훈(22), 모태범, 이상화(이상 21)가 11일 모였다. 2007년 입학 이후 언제나 붙어 다녀 별다를 일도 없지만, 이날만은 특별했다.
지난 1일(한국시간) 끝난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를 합작한 이후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이들은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학교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연일 계속되는 빙판 밖 강행군에 파김치가 됐지만, 모처럼 학생으로 돌아와 만난 셋은 맘껏 '수다'를 떨었다. 이들과 총장실에서 마주한 김종욱(54) 총장은 삼총사가 마냥 대견스럽다는 눈치였다. 매일 새벽 6시 5㎞, 일주일에 한번씩 12㎞ 달리기에다 틈만 나면 하프마라톤대회에 출전하는 '준(準)선수' 김 총장은 그래서 더 삼총사가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금메달 유세? 학교 안에선 안 통해
한국선수단이 역대로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따낸 메달의 30%가 한국체대 소속 또는 출신들한테서 나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삼총사도 학교에 들어서면 900여명 학생들 중 3명일 뿐이다. 3일 해단식 후 바로 다음날 등교한 이승훈 등 3명에게 특별 대우는 없었다. 수업 전 앞으로 나가 받은 박수 한 차례가 고작. 이승훈과 모태범은 곧장 기숙사에 들어가는 바람에 집에서 잔 적이 한두 번뿐이다.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지 얼마 안돼 '옛사랑'에 미련이 남은 이승훈은 매일 새벽 5시부터 3시간 동안 학교 빙상장에서 쇼트트랙 훈련을 한다.
"학교에 들어오면 운동만 생각할 수밖에 없게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다"는 김 총장은 "흡연이 적발되면 유기 정학, 음주가 발각되면 무기 정학"이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학교가 최근 들어 부쩍 주목 받고 있지만, 대한체육회와 태릉선수촌,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전부 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이 나온 것"이라며 자세를 낮췄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이 '견학'을 올 정도로 한국체대는 엘리트 체육의 요람으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활체육의 장(場)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움직임도 뚜렷하다. 한국체대는 교수와 조교들이 강사진으로 나서는 빙상, 수영, 댄스스포츠 등 다양한 일반인 대상 강좌들을 속속 개설, 학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인기 연연은 남 얘기
"새벽 6시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계속 이래요." 모태범이 한숨을 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삼총사는 양 볼이 홀쭉해 졌다. 2일 귀국 후 끊이지 않는 방송 출연과 화보 촬영, 인터뷰 등으로 몸살이 날 지경이다. 그래도 셋은 웃고 말았다. "색다른 경험이에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잖아요.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랄까? 어제 화보 촬영을 했는데, 거울 볼 때 '이게 나 맞나?' 싶더라고요." 이상화에 이어 이승훈이 거들었다.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잘했으니까 이만큼 관심 받는 거잖아요." 삼총사의 스케줄은 이달 말까지 일말의 빈틈도 없이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 짬을 내 커피숍이라도 들어가면 멀쩡히 커피를 마시던 손님들이 서로 값을 지불하겠다고 둘러싼단다.
주변의 관심이 고맙지만, 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 "영화 보러 가고 싶어요. 친척들까지 다 모여서 밥도 먹고 싶고. 친척들한텐 제대로 인사도 못했거든요." 이승훈이 입을 떼자 이상화와 모태범도 상상으로나마 단꿈을 꿨다. "스케줄 끝내고 집에 돌아가면 어쩔 땐 새벽 3시더라고요. 식구들하고 오붓하게 시간 보내고픈 마음뿐이에요." 모태범은 머리 속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올림픽 전부터 생각해 왔던 거예요. 지금은 계획 잡을 시간도 없지만, 가족들과 꼭 여행 가려고요."
단숨에 얻은 인기는 오래 붙잡기가 힘든 법. 치솟은 인기가 떨어질까 고민되지나 않을까. 셋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승훈은 "인기가 떨어질까 두려운 것보다는 성적이 떨어질까 두렵다"고 했고, 모태범은 "그런 것 신경 쓰면 운동 못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10년 뒤, 20년 뒤 삼총사의 모습은?
졸업반이 된 삼총사는 4월 초부터 나란히 교단에 선다. 모태범은 덕소고에서, 이상화는 모교인 휘경여고에서 한 달간 교생 실습을 한다. 하반기로 미룰 계획이던 이승훈도 친구들과 같은 기간에 실습에 나서기로 했다. 이승훈은 서울체고에서 교생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교편을 잡으면 이 한마디는 꼭 해주고 싶다고. 이승훈은 "긍정의 힘", 모태범은 "너희들도 하면 된다", 이상화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목표를 세워라"란다.
실습을 마치면 그때부터 또다시 쳇바퀴가 시작된다. 오는 10월 말 있을 대표선발전을 시작으로 2010~11시즌에 돌입한다. 올림픽 챔피언에 걸맞은 활약을 펼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그런데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고 운동선수입니다. 운동선수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이상화가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한다"고 칭찬한 이승훈은 다음 시즌 얘기가 나오자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모태범과 이상화도 마찬가지. 모태범은 "못하면 그만큼 욕도 많이 먹을 것 아니냐. 큰 관심을 역이용해 자극제가 되도록 하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화는 '발전'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실었다. "올림픽 금메달 덕에 나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더 발전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이상화, 이제 끝이네'라는 소리 안 듣게끔 계속 발전해 나가는 선수가 돼야죠."
30, 40대가 된 삼총사의 모습은 어떨까. 모태범이 "내가 할 일만 열심히 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잘돼 있을 것"이라고 시원스럽게 입을 열자 이상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훈은 이번에도 '진지 모드'. "대학교 1학년 때 자기소개를 할 때 IOC 위원이 되고 싶다고 얘기했었어요. 지금은 사업가도 좋을 것 같고, 강단에도 서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탈인데, 차근차근 생각하다 보면 길이 보이겠죠?"
인터뷰 뒤 근처 고깃집에서 허기를 채운 삼총사는 또 다른 스케줄을 소화하러 발길을 돌렸다. 준비된 승합차에 오르기까지 역시나 줄을 잇는 사인과 기념 촬영 요청. 삼총사 주변에서 "너무 잘생기고 예쁘다", "이런 영광이 또 있을까", "지금 밥이 문제냐"란 말들이 떠돌았다. 싫은 내색 없이 '팬 관리'를 마친 삼총사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모았다. "다 좋은데 이 선수단복 빨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밴쿠버에서부터 계속 입고 있다니까요."
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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