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ㆍ유영미 옮김/들녘 발행ㆍ264쪽ㆍ1만2,000원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난 적은 없다. 함께 영화관에 간 일도 물론 없다. 독일의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두 사람을 영화관으로 불러낸 것은 과학과 예술의 동시대적 발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제각각 자기 분야에서 혁명을 일으킨 두 사람의 공통점은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시공간은 20세기가 발견한 것이다. 뉴턴 물리학까지만 해도 시간과 공간은 따로 존재하는 불변의 상수였다. 세계는 단단해 보였다.
그런데 모든 게 바뀌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이전에 분리돼 있던 시간과 공간을 이어 놓았고,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뤄진 연속체로서 시공간을 화면에 끌어들였다. 대상의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의 그림은 한정된 화폭에'흐르는 시간'을 담아냈다. 두 사람이 영화관에서 만나는 것도 바로 이 시공간 개념과 관련이 있다. 움직이는 영상으로서 영화는 시공간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자리에 20세기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초대한 것은 자연스럽다. 베르그송은 불변의 대상과 현상을 다루던 기존 철학이 간과했던 '운동'에 주목한, '운동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예술과 과학, 철학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두 천재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20세기 지성사를 요동치게 했는지 보여준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불확정성 원리'와 동시대 화가 칸딘스키의 추상주의를 나란히 대비하는 등 그들의 후계자들도 아우른다. 하이젠베르크가 펼쳐 보인 변덕스럽고 놀라운 양자물리학의 세계와 구체적 형태가 사라져버린 칸딘스키 그림의 자유분방한 추상성은 분명 서로 통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오지랖 넓고 사려 깊은 성찰은 감탄스럽다. 그는 칸트, 베르그송 등 철학자 외에 세잔,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의 미술가, 윌리엄 제임스 등 심리학자까지 수시로 불러내 20세기 과학과 예술이 서로 어떤 자극을 주고 받으면서 근사한 혁명을 구가했는지 설명한다.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그의 책 목록에서 <인간> 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는 한국에서도 과학 스테디셀러다. 슈뢰딩거의> 인간>
"예술 없는 과학은 잔혹하고 과학 없는 예술은 우스꽝스럽다."저자가 이 책에서 여러 번 인용한, 20세기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말이다. 과학과 예술, 과학과 인문학을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 명구다. 과학의 차가운 이성과 예술의 뜨거운 감성을 한데 녹여내는 일은 얼마나 멋진가. 저자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따라서 우리는 두 쌍의 눈(즉 네 개의 눈)으로 본다. 낭만주의 시대의 표현처럼 '외적인 눈'과 '내적인 눈'으로 말이다. 영화관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는—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그랬듯—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이 책은 그렇게 두 쌍의 눈으로 본 20세기 지성사의 지도이기도 하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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