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수원에 갔다가 지역에서 환경교육 활동을 해온 김 선생의 안내로 근처 산에 올랐다. 우리나라 특산 식물인 귀한 변산바람꽃을 만났다. 두터운 낙엽 사이로 삐죽이 올라온 꽃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고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봄 꽃을 찍어야만 했던 나는 그렇다 해도 궂은 날씨에 먼 길을 잡아준 김 선생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변산바람꽃이 그렇게 정겹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시간이 멈춘 생명의 땅
필자는 주로 서부 DMZ(비무장지대) 민통선 지역의 생태환경을 조사,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앳돼 보이는 군인의 활기찬 경례를 뒤로 하고 임진강을 건너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다. 덜컹거리는 흙 길로 차를 몰다 보면 억새 밭 사이 빈터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 있다. 셔터를 눌러 고라니를 사진에 담고 풀숲 사이 길에 멈춰서 잠시 강물을 본다. 시간이 멈춘 듯 적막감이 흐른다. 가끔 무리 지어 이동하는 재두루미와 기러기 떼나 사격장 총 소리가 정적을 깬다. 반세기이상 출입이 통제된 곳, 시간이 멈춰선 지대, 사격장 총소리마저 자연의 일부가 된 곳, 자연만이 마음껏 자유를 누린 땅이다.
1953년 휴전 이후 이곳은 우리 민족에게 한국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이겨내야 하는 시련의 상징이었다. 인간의 시간이 멈춘 동안 자연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아름답게 되돌려놓았다. 아픔과 고통을 참아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처럼 DMZ는 훼손되지 않은 마지막 생태지역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DMZ는 이미 국제적으로도 긴장지역이기보다 우수한 생태지역으로 주목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국민들에게는 청정지역, 즉 '생태환경의 보고(寶庫)'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곳의 생태환경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어떤 생물종이 얼마나 존재하고 멸종위기종과 희귀식물들은 또 얼마나 존재하는지에 대한 조사 보고는 빈약하기만 하다.
사실 민통선이나 비무장지대를 처음 돌아보면 눈에 띄는 군부대와 초소만 빼면 인적이 드문 농촌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와보지 않고 모르는 사람들조차 이곳이 대단히 훌륭한 생태지역일거라고 믿는 것일까. 인간의 간섭과 방해가 없는 곳에서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대부분의 자연 생태계는 사람들이 망가뜨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 민통선 내에 자주 가던 둠벙, 물 웅덩이에서 금개구리를 발견하고 사진기록을 발표한 적이 있다. 언론사와 이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한 달쯤 지나 다시 찾은 둠벙에는 금개구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 둠벙은 처음과 달리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이후 필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 DMZ의 생태환경 보전 및 개발 계획이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개발과 보전이라는 이중 잣대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아 위험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DMZ를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이 생태계 보전 방안보다는 경제적 이득에 주목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후손에 값진 선물로 보존을
그래서 묻는다. 그 모든 것의 바탕에 단절과 고립의 세월이 만들어준 공간적 가치에 대한 고려가 있는가? 폐허 속에서 스스로 되살아 나는 거대한 생태계의 순환과 유기적 관계를 잊지는 않았는가?
보이지 않는 무수한 생명들이 수 십 년 동안 일구어놓은 DMZ 생태공간을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열광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다시 짓밟아서는 안 된다. DMZ는 우리 자손들에게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전하는 소중한 선물로 남겨두어야 한다.
전선희 DMZ 생태연구가 푸른경기21실천협의회 습지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