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또 땅끝에 서고 말았다. 이리로 몰아온 건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 천불이고, 떨쳐내지 못한 번민이다. 대체 무에 그리 설웠는지.
마지막 벼랑 끝에는 파란 바다가 펼쳐졌을 거라 기대하고 왔건만 바다는 안개로 희뿌옇기만 했다. 땅끝탑 옆에 한참을 서있었지만 가슴은 쉬 시원해지질 않는다. 갯바위로 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도 없을 때엔 소리도 질렀다. 하늘과 맞닿은 뭉개진 수평선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먹먹한 풍경에 먹먹한 가슴을 녹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작차작 갯바위에 부딪는 파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됐다고, 그래 다 안다고. 토닥토닥 마음을 두드려준다. 찔끔 한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한반도 최남단 전남 해남의 땅끝에 있는 미황사에 하룻밤을 의탁하기로 했다. 늦은 오후 절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사찰을 감싼 달마산 연봉은 비구름을 장막 삼아 모습을 드러냈다 가렸다 하며 희롱을 해댄다.
일주문 뒤 동백의 숲이 깊었다. 절정의 꽃들이 바닥을 짙붉게 물들였다. 미황사 동백이 이리 고왔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종무소에 들러 방을 얻었다. 고운 보살님이 대웅전 마당 옆의 깨끗한 방 하나를 내주셨다.
오후 6시. 저녁 공양시간이다. 스님끼린 다른 상에 앉았고 템플스테이 객은 다른 상에 자리했다. 이날 미황사를 찾은 템플스테이객은 서른 한살의 스페인 청년 요르헤 포르티요와 나 둘 뿐이다. 스님의 공양을 방해할까봐 눈으로만 살짝 인사를 나눴다. 포르티요는 한국음식을 좋아하는지 접시를 싹싹 비워냈다.
오후 7시 10분 전. 종이 울렸다. 곧 있을 저녁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지묵 스님의 안내로 대웅전에 들어섰다. 스님들을 따라 절을 하고 불경을 읊조린다. 따라 읽는 우리말 반야심경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무념도 없고 또한 무념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저녁 예불을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어둠이 짙게 내리누른 경내엔 적막만 가득했다. 주체할 수 없는 고요와의 조우다. 무거운 침묵의 시간은 길었고 생각도 따라 깊어졌다. 포르르 이슬비 내리는 소리가 창호지 문을 적셨다.
새벽 4시. 도량석에 잠을 깼다. 사찰의 새벽을 깨우는 소리다. 아주 작게 시작해 점점 커지는 목탁소리. 가랑비에 옷이 적듯 잠은 급하게 깨어나지 않고 차츰차츰 말갛게 깨어난다.
스님과 보살님들이 한 분 두 분 대웅전으로 모여들었고 비안개로 가득한 경내엔 다시 예불소리가 번졌다. 들숨과 날숨이 반복되는 일정한 리듬의 예불소리가 새벽 안개에 촉촉히 젖어 들었다.
새벽예불을 끝내고 지묵 스님을 따라 참선을 배웠다. 반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반듯이 폈다. 가늘게 눈을 뜨고 호흡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숫자를 세어가며 천천히 배꼽 밑에까지 숨을 들이 마셨다 내뱉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호흡이 편안해졌고 몸도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경내를 산책하고 있는데 주지인 금강 스님이 부르신단다. 템플스테이 동창인 포르티요와 함께 스님 방에 들어섰다. 차를 따라주시는 금강 스님은 89년부터 당시 폐허 같았던 미황사를 지금의 반듯한 가람으로 일구신 분이다. '지게 스님'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손수 돌을 나르고 굴삭기를 운전해 흔적만 남아있던 누각들을 복원해냈다.
함께 차담을 나눈 지묵 스님은 "땅끝은 체념이자 또 다른 시작"이라고 했다. 본인도 수행의 끝을 찾아 땅끝에 왔다가 금강 스님과 인연이 되어 미황사에 남게 됐다고 했다.
금강 스님은 "땅끝은 다시 힘을 갖게 해주는 곳"이라며 "미황사에 오는 분들 대부분이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온다. 힘겨워하는 그들에겐 말 한마디의 위로, 반가운 미소가 큰 위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미황사까지 찾아왔다는 스페인 총각에게 이곳에서의 하룻밤 중 가장 좋았던 게 뭐냐 물었더니 "사일런스(Silence)"라고 바로 대답했다. 그리곤 "이 새소리 정말 즐겁지 않느냐"며 창호지 문을 가리켰다. 금강 스님이 문을 열어 젖히자 빨간 동백숲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의 모두들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보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해남=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여행수첩/ 해남 미황사
●미황사는 경을 싣고 가던 소가 누워 점지했다는 절집으로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전란 등을 거치면서 절은 불탔다가 다시 지어지는 등 부침을 거듭했다. 보물 제947호인 미황사 대웅전은 단청의 빛이 바랜 맨얼굴이다. 화장하지 않는 기둥과 지붕은 나뭇빛 그대로다. 대웅전 주춧돌에는 특이하게도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다.
●미황사를 감싼 달마산은 해남의 금강이라 부르는 명산이다. 높이는 대단치 않지만 기암의 산세와 조망이 빼어나다. 미황사에서 바로 문바위 달마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5월까지 통제된다. 이외 부도전이나 도솔암 등의 코스로는 오를 수 있다.
●미황사에서 숲길을 따라 10분 가량 걸어가면 부도전에 이른다. 수십여 부도가 아늑한 솔숲에 들어앉았다. 이 부도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달마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도솔암을 거쳐 땅끝까지 이른다. 예전 어부와 아낙들이 불공을 드리러 걸어오던 길이다. 금강 스님은 이 길을 천년역사의 길이라 이름했다. 땅끝까지는 걸어 5,6시간 걸린다.
●미황사 템플스테이는 홈페이지(www.mihwangsa.com)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산사체험 프로그램으로 예불과 공양, 울력 만 꼭 지키면 되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유스럽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1박2일 프로그램의 경우 5만원, 개인 방을 원하면 8만원이다. (061)533-3521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 이성원의 여행편지 "보성 강골마을 잘 지켜주십시오"
득량정보화마을의 이정민 운영위원장님께.
덕분에 하룻밤 잘 쉬고 올라왔습니다. 모처럼 온돌방에서 푹 잠을 잘 수 있어서 몸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전국의 전통마을을 거의 다 돌아다녔어도 역시 위원장님 계신 보성의 강골마을 만한 곳은 찾기 어렵습니다. 2년 전 찾았을 때 첫눈에 반해 고향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짙은 대숲이 둘러싼 마을은 여전히 아늑했고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온 돌담길도 변함없이 정겨웠습니다. 고택 건축의 미학을 보여주던 정자 '열화정'엔 붉은 동백이 수놓고 있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집집의 흙담엔 아직도 두꺼비가 살고 있고, 사람 사는 집이면 제비가 둥지를 트는 꿈의 고향입니다.
다른 곳들은 손님들 받겠다고 수세식 화장실에 식당 등을 새로 지으려고 안달이던데 강골마을은 아예 '불편한 하룻밤'을 체험하라며 배짱입니다. "시골은 시골이지 눈요기거리가 아니다. 촌놈은 촌놈다워야 하고 농촌은 농촌다워야 한다"는 말씀이 귀에 선합니다. "주민들 삶에 끼어들어 서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농촌체험을 할 수있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연산홍 두 그루로 흥겨운 철쭉제를 펼쳐내고, 벚꽃 흐드러질 땐 득량역에서 벚꽃카페를 열어 낭만의 축제를 만들어낸 마을입니다. 지난 여름 극성수기에 일부러 2가구만 예약 받았다고 했습니다. 혹 강골마을에 흠뻑 빠졌던 분들 중 재방문하고 싶어하는 손님이 있을까 남겨두었던 것이죠. 큰 맘 먹고 마음의 고향을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가슴 찡한 배려였습니다. "성수기라고 방값 올리고 아무에게나 방을 내주면 돈이 될 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곳에 남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관에서 360억원을 지원할 테니 민속마을로 번듯하게 만들어보자고 한 것을, 너무 과한 욕심은 탈이 나게 마련이고 허울뿐인 민속마을 개발은 이제껏 마을을 지켜온 공동체를 무너뜨릴 것이라며 개발을 온몸으로 막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마을에 수십 동의 한옥을 새로 짓고 박물관에 저자거리까지 민속촌처럼 꾸미겠다는 관의 청사진을 들어보니 저도 혀가 차지더군요. 마을을 통째로 망가뜨리겠다 싶었습니다.
지난 겨울 동네 할머니들과 완전 재래식의 엿을 만들어 팔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셨다죠. 엿 하나도 쉽지 않은 거라고. 불 조절 한번 실수에 엿 전체를 망칠 수도 있고, 날씨에 따라 엿을 당기는 힘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할머니들의 경험들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고요. 시골의 할머니 한 분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며 그들의 경험을 어떻게 남겨둘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고 했습니다.
요즘 힘이 드시는지 얼굴이 많이 꺼칠해지셨습니다. 일부 주민들의 반대가 있다면서요. 마을회관서 만들어 팔던 엿도 시끄러워 따로 나와 작업장을 만들어야 했고, 마을의 연못을 복원하는 문제로도 애를 태웠다 들었습니다. 사람 사는 마을이다 보니 단 돈 몇 푼이지만 시기심이 생겨 시끄럽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많이 다치셨을 텐데도 "요거이 시골이요"라며 웃어넘기셨습니다. 단 몇 푼에도 이런데 360억원이 개입되면 정치인 토호들 지역언론 등이 뒤엉켜 마을은 풍비박산 날 것입니다. 박제화된 전통마을, 장삿속만 있고 공동체가 사라진 전시 마을로 바뀐 민속마을의 전철을 강골마을만큼은 밟지 않길 바랍니다.
27가구 되는 마을 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70대를 훌쩍 넘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지금의 마을도 길어야 10년 짧으면 5년에 끝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마을이 미래를 여는 시간이 빠듯합니다.
전통마을의 미래, 나아가 지속 가능한 전통마을의 정답을 강골마을에서 보고 싶습니다. 싸우고 버티는데 힘겨우시더라도 좀 더 힘을 내주세요. 만일 못난 행정이 강골마을을 계속 망치려 든다면 저를 비롯한 마을을 사랑하는 이들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부디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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