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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북한산 순례길, 임들과 함께 걷는 '나라사랑 길'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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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북한산 순례길, 임들과 함께 걷는 '나라사랑 길' 열렸다

입력
2010.03.1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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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을 숱하게 올랐으면서도 길 옆의 무덤들에게까지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은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등산객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저 높은 곳에 어서 오르려는 급한 마음에, 애국지사와 현대 정치 거물들의 묘소를 외면해온 것이다.

이들의 묘역을 잇는 도보길이 최근 '북한산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됐다. 실핏줄처럼 나있는 기존 샛길을 연결하고 나무계단 등을 설치해 만든 것인데 북한산과 도봉산을 도는 북한산 둘레길 전체 63.1㎞의 첫 코스 겸 시범코스다. 2012년까지 북한산 둘레길을 완성하겠다고 지난해 9월 발표한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6일 순례길 개통식과 함께 나머지 구간 착공식을 갖는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솔밭공원에서 북한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수유분소에 이르는 3.4㎞가 순례길 전체 구간이다. 길이가 짧다 보니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을 돌 때처럼 아름다운 경치와 다양한 문화를 접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애국지사와 정치인의 묘소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국립묘지를 제외하고는 이곳이 유일하다.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애국지사의 묘역이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곳을 들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을 도는 것과 같은 본격적인 도보여행은 북한산 둘레길이 완성될 때까지 미루고 지금은 길을 걸으며 신숙, 서상일, 김도연, 김창숙. 양일동, 유림, 이시영, 김병로 선생 등의 묘역을 들르면서 한국 현대사를 되새기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러고 보니 순례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 길을 순례하며 일제 식민통치, 독립, 남북분단 등으로 이어진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 그리고 그 시기에 활동했던 선조들의 삶을 되돌아보라는 뜻인 것 같다.

솔밭공원을 지나 표지판을 따라 가면 이내 순례길 입구가 나온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간단하게 설명한 표지판을 읽으면서 나무계단을 오르면 바로 순례길로 붙는다. 잿빛 겨울풍경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봄이 온 것도 아니어서 나무에는 아직 새순이 돋지 않았고 길 옆에는 낙엽이 여전히 뒹굴고 있다. 꽃도 피지 않아 아직은 황량한 황토 산길이지만 이 산을 진달래 같은 꽃이 덮을 시간이 멀지 않았다. 북한산의 꽃 중에서는 진달래가 특히 아름다운데 내 경험으로는 그 진달래가 만개하는 시기가 대개 4월19일, 즉 4ㆍ19 혁명 기념일 즈음이다. 그때 희생된 민주 영령을 모신 곳이 바로 국립 4ㆍ19 민주묘지인데 순례길에 들어선 지 10여분이면 묘지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지금 우리가 이 정도의 민주주의를 누리는 것은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자꾸 그날의 의미를 잊는 것 같아 묘지를 내려다보며 부끄럽고 죄송한 생각이 든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암살을 기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전개한 신숙(1885~1967) 선생의 묘역이 나온다. 길은 다시 대동청년단을 구성해 항일운동을 하고 훗날 한민당과 진보당에 관계한 서상일(1887~1962) 선생과,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투옥되고 이승만 정권의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김도연(1894~1967) 선생의 묘역으로 이어진다. 다시 누런 흙길을 걸으며 김창숙(1879~1962), 양일동(1912~1980) 두 선생의 묘역에 도착한다.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한 뒤 항일운동에 뛰어든 철두철미한 투사였으며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항거해 고초를 겪었다. 유림답지 않은 유연한 행보로 해방 직후 좌우 합작은 물론 기독교, 불교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양일동 선생은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으며 훗날 국회의원과 통일당 당수를 지냈다.

두 사람의 묘역 앞으로는 제법 넓은 계곡이 있는데 지난 겨울 눈과 얼음으로 덮였을 계곡이 콸콸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흐르는 것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붉은 색 포장 길을 따라 가다 옆으로 소나무가 뻗어있는 운치 있는 나무 다리를 지나면 유림(1898~1961) 선생의 묘지다. 가까운 곳에 묻힌 김창숙 선생 등과 함께 월간 '천고'를 발행, 독립의식을 고취한 아나키스트로 해방 후 독립노농당을 창당, 반외세와 자립자강을 외쳤다.

계곡을 끼고 이어진 길은 이시영(1869~1953) 선생의 묘역으로 이어진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해방 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반발, 사직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항복이 10대조인 그의 집안은 정승, 판서, 참판을 배출한 명망 높은 가문이었으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이회영 등 다른 다섯 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처분, 만주로 달려가 항일운동에 뛰어든다. 이들이 처분한 재산이 2000년 가치로 600억원에 이른다고 추정한 역사연구가 이덕일은 여섯 형제가 항일운동에 나선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노블레스오블리주의 표상으로 평가했다.

1940~45년 태항산 등 중국 각지에서 사망한 광복군의 합동묘소를 지나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1887~1964) 선생의 묘소에 도착했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그는 숱한 독립운동의 변론을 맡았으며 좌우 합작을 위해 노력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직을 맡았고 1956년에는 이승만 정부에 맞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1894~1956) 선생의 묘역도 가까운 곳에 있다.

출구를 빠져 나오기 직전에 들른 곳은 이준(1858~1907) 선생의 묘역이다. 1907년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고발하려 했으나 일본 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순국, 현지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유해를 모신 것이다.

이들의 묘역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교과서이자 교훈이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곳에 묻힌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이들의 묘역을 보면서는 그런 차이 정도는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이들이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며 우리 후손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의 묘역이 진달래능선 등 북한산 오르는 길로 이어지니 등산할 때도 한 번 들르는 것이 좋겠다. 지금도 노란 흙길을 밟는 감촉이 좋지만 날이 더 따뜻해지면 꽃이 만발하고 나무에도 물이 오를 것이니 그때는 걷기가 한층 즐거울 것이다.

국가보훈처의 관계자는 "북한산 자락에 이분들의 묘역이 모여 있는 정확한 이유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며 "묘지로는 터가 좋은 곳이어서 후손들이 한 분, 두 분 이곳으로 모시다 보니 다른 분들도 따라 모신 것 같다"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 북한산, 오르려고만 하지 말고 지켜봐 주세요

자연이 서울에 준 가장 큰 선물로 북한산을 꼽는 사람이 많다. 세계의 대도시 가운데 이렇게 멋진 산을 품은 곳이 없다는 말도 많이들 한다. 하지만 그런 찬사의 이면에서, 북한산은 오늘도 신음하고 있다. 연 800만명 이상이 찾아오기 때문에 생태와 경관이 빠른 속도로 훼손되고 있다.

탐방객의 상당수는 북한산의 봉우리를 향해 올라간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서울, 의정부, 고양에 걸쳐 북한산국립공원을 두르는 둘레길 63.1㎞를 2012년까지 조성키로 한 것은 수직적 탐방문화를 수평적 탐방문화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고지대 훼손을 줄일 수 있고 노약자, 장애인, 어린이도 북한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공단은 제주, 지리산 등으로 도보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수도권 주민이 가까운 곳에서 자연과 문화를 느끼고 사색을 할 수 있는 명품코스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북한산 둘레길은 국립공원 경계부 저지대의 기존 탐방로, 마을 안길, 옛길 등을 연결해 자연탐방, 산림휴양, 역사문화, 경관조망, 전원레저 등의 주제에 맞춰 조성된다. 탐방지원센터와 자연관찰로, 장애인 산책로, 자전거 길 등도 들어선다. 길을 다 걷는 데는 3, 4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박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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