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라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듯 잔뜩 찌푸린 4일 오전 10시 경기 성남시 야탑역 4번 출구. 회색 구름이 짙어질수록 출구 앞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의 손길도 점점 빨라졌다. 컨테이너 밖에는 '우산 무료로 빌려 드립니다.' '공짜로 고쳐 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이 내걸려 있었고, 안에는 우산 3,000여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 40대 중년 여성이 다급한 듯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할아버지, 우산 하나 빌려가도 돼요? 갑자기 비 올 것 같네요." 그러자 박스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져 가요. 하지만 날이 개고 나면 꼭 반납 하시우"라는 넉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망가진 우산을 내 놓거나 우산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은 1분에 한 명 꼴로 이어졌다.
3평 남짓한 이 공간의 주인은 '우산 할아버지'로 불리는 김성남(80)옹. 1980년 3월 4일부터 서울 성내역 앞에서 간이 파라솔을 펴 놓고 무료 우산 수선을 시작했으니 이 날로 꼭 30년째다. 그 세월 동안 김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 간 우산은 하루 평균 40~50개로 무려 60만개가 넘는다.
김 할아버지가 우산 수선을 시작한 것은 성내역 근처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면서부터. "우산 살 하나 빠져도, 끈이 조금만 떨어져도 그냥 버리잖아요. 그러다 정작 비가 올 때는 허둥지둥 대고… 참 보기 안타깝더라구요."
처음에는 비닐 우산을 여기저기에서 수집해 모아 뒀다가 비 오는 날에 사람들에게 나눠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직접 수선까지 하게 됐다. 우산 공장에서 방출된 불량품이나 재활용 집하장에서 외면 받은 우산을 모았다. 거리에 버려진 우산도 김 할아버지의 손에 들어가면 훌륭한 재활용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도저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우산은 다른 우산의 부속품으로 사용됐다. 이렇게 고쳐진 우산은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시민들의 손에 쥐어졌다.
김 할아버지의 못 말리는 우산 사랑은 91년 성남으로 이사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최근에는 1주일에 한 번씩 서울 서초구청과 경기 과천시청에 가 우산 고쳐주기 강습도 한다. 지난해 말에는 우산 수선으로 푼푼이 모은 쌈짓돈 75만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성남시에 기탁했다. "무료로 우산을 고쳐준다고 해도 굳이 500원씩, 1,000원씩 놓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걸 모아 좋은 일에 써 달라고 시청에다 부탁 했죠"라고 했다. 또 이달 초 성남시청에 우산 200개를 기탁하는 등 수도권 지자체에도 무료 우산을 공급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이 일을 "나름대로 작은 덕을 쌓는 일"이라고 했다.
지난 30년 동안 우산도 세월 따라 변했다고 했다. "예전 비닐 우산은 찢어지거나 살이 부러지면 아예 고치기조차 불가능했거든요. 그래서 조금 망가졌더라도 다시 쓰고 아껴 쓰던 정감이 있었죠. 요즘은 자동ㆍ반자동 기능은 기본이고 알록달록한 디자인 우산, 골프용 대형 우산, 어린이용 캐릭터 우산, 3단 접이식 미니 우산 등 종류도 많아 졌죠. 하지만 예전만한 정감은 사라졌어요"라고 했다. 살이 부러지더라도 조금만 수선하면 새 것 같이 쓸 수 있는데도 그냥 내 버리는 모습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발걸음도 조급해 졌다. "할아버지, 수지(용인시 수지구) 가려면 몇 번 타야 해요?" "820번은 여기서 타면 되고, 720번 타려면 좀 더 올라가서 길 건넌 뒤 타시구려"하고 친근해 알려줬다. "우산만 고치는 게 아니라우. 여기 앉아 있으려면 성남 시내는 물론 인근 시외 버스 노선 정도는 줄줄 꿰고 있어야 해요. 시에서 관광 안내 명목으로 근무비라도 받아야겠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글ㆍ사진=강주형 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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