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검정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이란다."
"누가 거기 갖다 놓았는데?"
"바람이 실어다 놓았겠지, 뭐."
"그러면 아버지는 바람의 아들이네."
저의 아버지는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어머니는 개가(改嫁) 하셨지요. 그래서 1910년대 부산 부평동 검정다리 근처에서 밥집 하던 외할머니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최초의 성장 스토리는 1919년 기미 만세운동 에피소드입니다. 이때 아버지는 열 다섯 나이의 소년입니다.
"동래고보 학생들이 부산 대로를 가로지르는 철로에 돌을 깔아 놓아 전차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뛰어 들어 전차를 밀어서 넘어 뜨렸다. 우리는 학생 신분이 아니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때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나눠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같이 부르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청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돌아다니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죽도록 얻어 맞았다. 이때 부평동 검정다리 동네 친구 한명이 맞아 죽어 구덕산 언덕에 태극기와 함께 묻었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 아니라서 열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게 지금까지 분한 마음으로 남아 있다."
"나는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인력거를 끌었다. 뚱뚱이 미국인 선교사 어을빈은 엄청 무거웠지만, 내릴 때 동전을 아무렇게나 집어서 던져주기 때문에 인력거꾼들이 서로 태우려고 몰려 들었다. 어을빈이 만든 만병수(萬病水)가 인기가 있어 날개 돋친듯 팔렸고, 부산 영도 출신 처녀를 간호사로 데리고 다녔다. 양장을 입고 양산을 쓰고 다니는 그녀가 너무 이뻐서 조선 소년이면 모두 그녀를 흠모했다. 그녀는 어을빈의 양딸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상 첩이라는 소문이라서 조선소년들은 마음에도 없는 욕을 해대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 간호원은 일본에서 건너온 약사 에비스에게 속아 넘어가 만병수 제조법을 빼돌렸단다. 결국 어을빈에게 쫓겨나고 믿었던 에비스에게 버림받아 부산 앞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단다."
1921년 부산부두 노무자들이 일본인 가네자와 상회(金擇商會)의 노동착취에 항거하여 조선 최초의 파업을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그곳의 17세 소년 노무자였답니다. 글깨나 배워 파업을 주도 했던 사람들은 붙들려 가거나 상회측의 회유에 넘어갔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부평동 검정다리 동갑계 친구 몇은 야밤에 고려환(高麗丸) 배에 올라갔답니다. 그들 10대 소년 노무자들의 선택은 감옥행도 훼절도 아니었습니다. 닥치는대로 소금 가마니 번쩍 들어 바닷물에 처넣고 바다로 풍덩 뛰어들어 도주했답니다.
그때 폭력적 저항을 벌인 부평동 검정다리 동갑계 소년 아나키스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이후 1937년까지 16년 동안 아버지의 행적은 바다 건너 일본 땅을 가로지르는 시간입니다. 내가 조사한 아버지의 행적은 규슈 지역 야하다 제철소에서 출발하여 관서해안을 따라 오사카 뒷골목으로 이동합니다. 이 이동경로는 그대로 일본 최대의 폭력조직 야마구치구미의 이동경로와 일치합니다. 야마구치 현에서 조직된 야마구치구미는 조선인이 행동대 일선으로 나섰고, 이들은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오사카로 치고 들어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일본에서의 행각은 몸에 새긴 문신으로 상징화 됩니다.
"어깨에 달과 별을 새긴 것은 칼을 맞아도 팔이 떨어져 나가지 말라고 새긴 것이고, 여기 배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새긴 것은 칼에 찔려도 내장이 튀어 나오지 말라고 새긴 것이다." 솔나무 이파리로 새겨 넣었다는 아버지의 문신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삶의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결혼 신청을 하기 위해 저희 집에 들렀던 기자 출신의 매형은 아버지의 문신을 보자마자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봄 여름 가리지 않고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마루에 앉아 사람들을 만나곤 하셨습니다.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6년 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시간을 보낸 아버지의 삶은 문신 그자체가 부적이며 훈장이었던 셈이지요.
1937년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귀향한 아버지는 자갈치 공동어시장의 중매인으로 자리잡습니다. 김해군 이북면 처녀와 중매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리지만, 제사 때와 명절 외에는 거의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동해안 지역의 명태어장을 전전하면서 곳곳에 딴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집에 들어올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파나마모자에 색안경 끼고 백구두를 신은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애증(愛憎)의 뉘앙스를 던집니다.
아버지는 집에 있으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세상 속에 길이 있고, 남자는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도는 바람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아버지는 1993년 89세의 나이로 집 밖에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거처를 찾아 갔을 때,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을 발견했습니다. 공책 종이 한 장 찢어 '장례비'라고 쓴 싸인펜글씨, 그리고 삼백만원이 들어있는 통장과 목도장이었습니다. '장례비'라고 직접 쓰면서도 일체의 유언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깨끗한 아웃(OUT)!
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곧 우리의 기층 민중사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저의 가족의 보잘것없는 내력을 부끄러워 않기로 했습니다. 영웅적 결단과 선비적 지조로 기록된 역사가 아니어도 무방하다. 조선 봉건사회의 강요된 해체, 강제된 근대화 과정에서 평생을 부랑(浮浪)의 삶으로 채운 가족사 또한 엄연한 역사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 이것 또한 내가 이어가야 할 삶의 영속성이라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요즈음 마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들쑤셔 대어도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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