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이 올림픽 유치에 이어 다시 한번 워싱턴에 강 펀치를 안겼다."
이달 초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 자국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에게 "우리는 대 이란 추가 제재에 반대한다"고 못박은 일에 대해 영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내린 평가다. 룰라 대통령의 이 발언이야말로 이란 옥죄기를 위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미국에 브라질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외교적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에 앞서 룰라 대통령은 지난달 쿠바를 방문해서도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내는 등 미국의 영향력에 도전하는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를 누르고 리우데자네이루를 2016년 올림픽 개최도시로 올려놓으면서 '삼바 파워'를 만방에 떨쳤던 브라질. 브라질이 최근 들어 경제력 위력은 물론 외교적 발언권을 전방위로 확대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는 분석이 외신들의 주요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 중국에 이어 주요3개국(G3)를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룰라 대통령의 유례없이 높은 인기 등을 기반으로 한 브라질의 도약이 이젠 초강대국의 반열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FT 등에 따르면 국제무대에서 점차 커지고 있는 브라질의 '자신감'은 미국에도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브라질은 남미의 리더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독립적인 노선을 걷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브라질의 존재감 부각은 미 워싱턴의 리더십 부재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에릭 판스워스 미주 비즈니스위원회 부회장은 "브라질의 대미 관계는 이전과 달라졌다"며 "브라질이 파트너인지, 아니면 라이벌인지 물어본다면 '둘 다'라고 답하겠다"고 FT에 밝혔다.
국제무대에서 브라질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는 널려 있다. 1월 아이티 강진 참사 때 브라질은 1,979만달러를 구호금으로 내놨다. 1억 달러를 지원한 미국을 제외하고 영국, 일본, 캐나다, 한국 등 주요국이 대체로 1,000만달러 이하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브라질의 구호규모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최근 보도에서 아이티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평화유지군 7,000명 가운데 최다 인원인 1,300명을 파병해 온 브라질이 아이티 강진을 통해 '큰 기회'를 얻었다고 전했다. FP는 "브라질의 아이티 파병 규모와 지원액이 지나쳤다는 평가가 있지만 덕분에 브라질은 점차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키워가는 기회를 얻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말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중남미 32개 국가 정상들이 내년까지 구체화하기로 합의한 새로운 미주 국제기구의 수장에 외신들은 하나같이 룰라 대통령을 '1순위'로 지목했다. 국제사회에서 급성장한 브라질의 위상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국제적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는 브라질은 국방강화 및 자원확보 경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프랑스, 러시아 등 군사대국의 기술이전을 통한 최첨단 지대공 방어망 구축과 제공권 증강 등에 수백억 달러를 아낌없이 쓴다든지, 아프리카 천연자원 수입 규모가 2008년 185억달러로 치솟았다는 뉴스들은 브라질이 걷고 있는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 '룰라 없는 브라질은 없다'
올해 말 임기가 끝나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여전히 80%를 넘는 지지율을 자랑한다. 인기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높다. 미 시사잡지 뉴스위크가 작년 룰라를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에 선정하기도 했다.
구두닦이로 생계를 꾸린 불우한 청소년기를 거친 룰라는 노동운동을 거쳐 대통령직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런 인생역정은 인간적 매력을 더했고, 1964년 군사독재 정권후 첫 브라질 좌파 대통령으로서의 리더십을 만들어냈다. 2003년 취임 즉시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에 시장주의자를 임명하는 등 시장의 불신을 잠재운 룰라는 좌파 일색 남미에 ‘중도 실용주의’ 바람을 일으켰다. 지지층인 노동자들의 반대에도 “우선은 경제 파이를 키워야 한다”고 설득했고 적자재정을 흑자로 바꿨다. 살인적인 물가를 잡고 뿌리깊은 불평등을 시정해 빈민층에게 지지를 받았고 중산층을 두텁게 했다. 서민 대통령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아 대중의 신뢰도 굳건하다. 현지 여론조사기관은 2월 룰라의 지지율이 81.7%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집권 첫해 83.6%와 거의 비슷한 지지율이다.
영 일간지 가디언은 5일 ‘노동자 그룹의 영웅’ 룰라의 꺼지지 않는 인기를 분석하며 “10월 대통령 선거 후에도 룰라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카리스마 리더십을 조명했다. 현재 차기 대선후보들의 지지율은 야당 후보가 약간 우세하다. 하지만 룰라 파워로 압도할 수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1 야당인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의 조제 세하 상파울루 주지사와 룰라의 노동자당(PT) 후보 딜마 호우세피 수석장관의 지지율은 작년 12월 14%의 격차를 보였지만 4%까지 좁혀진 상황이다.
룰라 대통령은 3선 연임제한에 따라 여성장관인 호우세피를 일찌감치 낙점하고 밀고 있다. 그는 “2014년 대선에 나갈 생각이 없다”며 “호우세피 장관이 올해 대선에 승리하고 다음번에도 연임에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2014년이 되도 룰라는 69세로 다시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달 20일 룰라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PT당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된 호우세피 장관은 카리스마 부족이 최대 단점으로 꼽힌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선출직에 나선 적이 없다. 현지 언론은 60년대 말 반정부 게릴라 활동에 투신한 이력을 가진 그가 룰라보다 좌편향 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로이터 통신은 4일 “1위를 달리고 있는 세하 주지사가 러닝메이트로 점찍은 미나스 제라이스 주지사 아에시오 네베스를 설득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세하 후보가 네베스를 놓쳐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유권자가 많은 남동부 표 확보가 어려워졌다며 대권 도전에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전망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 브라질의 힘, 어디서 나오나
브라질의 힘은 단연 경제에서 나온다.
브라질은 소위 브릭스(BRICs)로 불리는 신흥 경제대국 가운데 돋보이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2003년 이래 무려 세배 이상 증가했고 외환보유고는 약 2,157억 달러에 이른다. 이 같은 성장세라면 조만간 세계 5위 경제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는 지난 1월 "브라질이 2013년 무렵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을 제치고 세계 5위 규모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다가 2014년 월드컵 축구대회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올림픽 개최를 거치면서 성장세는 더 큰 폭발력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재빨리 벗어난 브라질은 자국 경제성장이 거품이 아님을 증명했다. 브라질은 수출보다 내수비중이 높고, 풍부한 원자재를 보유하고 있어 금융위기와 같은 외부충격에 강하다.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반면 중산층이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해 내수시장이 튼튼하다.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최근 브라질 신용등급을 내년 상향 조정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풍부한 외환보유액과 함께 금융부문에 큰 문제가 없어 외부 충격을 잘 흡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때문에 브라질을 여타 브릭스 국가와 차별해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6일 "브라질 경제는 아시아 국가들보다 더 견고하다"며 "특히 원자재에 힘입어 경제가 자생력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2010년 브라질의 경제 성장 전망치도 낙관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브라질 중앙은행은 올해 GDP가 각각 3.5%, 5.1%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성장률 예상치를 7%까지 높여 전망했다.
브라질 경제에서 우려할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투기과열과 인플레이션이다. 월드컵과 올림픽을 앞두고 브라질에는 해외 투자자금이 급격히 유입되고 있다. 브라질 국책은행인 경제사회개발은행의 루치아노 쿠틴호 회장도 최근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과열을 경고하며 "브라질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5%대로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도 최근 브라질 경제의 과열을 지적하며 "(브라질 증시에서) 투자금 회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년 중 인플레 압박이 가중될 가능성도 있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지난달 올해 인플레율을 세계 평균을 상회하는 4.26%로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인플레가 더욱 치솟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최지향기자 j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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