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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5> 수사기관의 유학 종용을 거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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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5> 수사기관의 유학 종용을 거부하다

입력
2010.03.0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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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어려움은 생활비 문제였다. 한동안 이부영 선배가 생활비를 몇 십만 원씩 주기도 하고 또 번역물도 가져다 주어 큰 도움이 됐으나, 그것이 계속되지는 못했다. 친구나 지인을 만나 20만~30만 원씩 받았으나 그것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어른들만이라면 돈이 없어도 며칠씩은 버티겠지만 두 살, 네 살짜리 아이가 있어 돈이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평생 끼고 있던 1돈짜리 금반지를 막내며느리에게 준 일이 있었는데, 마침 아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서 금은방에 팔기도 했다.

어쨌든 1982년 12월 중순 김대중 씨를 비롯하여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이 석방되고, 이듬해 5월 김영삼 씨가 단식투쟁을 전개한 후 이른바 '유화국면'이 도래했다. 김대중 씨는 석방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있는 김대중 씨와 국내에 있는 김영삼 씨가 1983년 8월 15일에 '김대중·김영삼 8.15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부영 선배의 요청으로 그 초안을 쓴 바 있다. 그리고 김영삼 씨 단식투쟁 때는 김정남 선배의 요청으로 '단식투쟁에 들어가며'라는 글을 써준 일도 있다. 이즈음 나는 비록 수배 중이었지만 이런 저런 일에 관여했다.

1983년 가을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면서 민주화운동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유화국면이라는 것이 비록 전두환정권의 정권유지 전략의 변화에 따른 것이어서 언제 탄압국면으로 돌변할지 모르긴 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탄압이 더 이상 용납되기 어려워지면서 민주화로의 진전은 시대적 대세가 된 것 또한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피신생활을 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정치상황도 그러했지만, 나를 피신시켜 준 분들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도 피신생활을 청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구속을 면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피신생활을 도운 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였다. 정치상황상 구속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피신생활을 도운 분들에게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김정남 선배가 안기부 고위당국자와 교분이 있던 함모 신부를 통해 알아 본 바, 나를 구속하지 않음은 물론 나의 피신생활을 도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없게 하겠으나, 조사는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내가 조사를 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피신생활을 도운 분들을 조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몇 차례의 협상 끝에 피신생활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결국 나는 안기부 근방 다방에서 안기부직원을 만나 안기부에 연행되어 갔다. 구속도 하지 않고 피신생활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 조사도 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유연한 수사 같았으나, 나에 대한 수사는 강도 높은 것이었다.

육체적 고문만 하지 않을 뿐 온갖 방법으로 나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피신생활을 도운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약속위반이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이미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40여 일간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관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나에게 바란 것은 나로 하여금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하는 거였다. 국내에 있어 봐야 또 구속될 것이니 외국에 나가 공부나 좀 하고 오라는 거였다. 물론 나에 대한 유학 요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도 귀찮게 요구해서 말로 끝날 일이었다면 '유학 가겠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겠으나, 말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유학에 동의하면 곧바로 절차까지 밟으려 들었다. 나는 유학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 유학을 가서는 안 되기도 했지만, 독재정권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어서 더욱더 싫었다. 유학 문제 때문에 수사가 더욱더 장기화된 점도 있었다.

어쨌든 40여일 만에 저들은 나를 석방했다. 후배들이 하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둥 이런저런 요청을 했으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었다. 마침내 피신생활이 끝난 것이다.

우리는 새로 집을 구해야 했다. 피신하기 전에 방 2개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피신하고서 처가에서 그 집을 처분하여 전세 돈을 보관하고 있어 그 돈으로 전셋집을 얻고자 했다. 그때 이소선어머니를 만났는데, 전세 얻을 돈이면 자기가 사는 동네에 비록 무허가판잣집이지만 살 수가 있으니 집을 사도록 권했다. 이소선어머니로서는 자기네 동네로 우리가 이사 와서 함께 살기를 바랐던 거였다.

그 방안이 괜찮았다. 우리는 전세 얻을 돈 700만 원에 처가에서 보태준 돈 200만 원을 합한 900만 원으로 무허가판잣집?샀다. 비록 9평짜리 무허가판잣집이었지만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되니 '내 집 마련의 꿈'을 온전히 이룬 거였다.

공동묘지 옆 산 속에 있는 좁은 집이었지만 공기가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마당이나 동네에서 마음 놓고 뛰놀 수 있어 맨션아파트가 부럽지 않았다. 또 약속을 하지 않고도 이소선어머니나 청계조합원을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밤 11시쯤 되면 청계조합원들이 이소선어머니네 큰방으로 모여들었다. 12시경까지 저녁식사를 끝내고는 새벽 2,3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통이었다. 유화국면이 시작된 데다 청계노조 복구대회를 앞두고 있어 조합원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나는 청계조합원들을 만나 청계노조를 지원하는 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재야민주화운동이 활성화되도록 재야세력을 재정비하는 일에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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