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성장한 도시 대구로 이른 낙향을 한 적이 있다. 서울의 번잡한 삶에 지친 터에 새로 출범하는 지역언론사에서 자리를 내주었다. 더러 고마운 만류를 무릅쓴 25년 만의 귀향이었다. 아주 눌러 살 작정을 했지만, 말 그대로 홍안 소년 때 떠난 사회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일과 사람에 익숙해질 무렵, 웬만큼 허물없는 사이가 된 동료가 내게"겨우 금강 휴게소까지 내려온 셈"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의아했다. 낙향한 연유를 저희끼리 가늠한 끝에 정치를 하려는 것으로 짐작했고, 그럴 뜻이라면 한참 더 열심히 지역과 사귀어야 한다는 충고였다.
사실 왜곡하는'대구 분지론'
애초 내게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지만 여러모로 새겨 들을 만 했다. 지역의 흔한 텃세, 배타적 보수성을 일깨운 것으로만 듣기 어려웠다. 동창 친구들만 해도 거의 절반이 서울에 사는 현실에서 지역과의 정서적 간극은 고속도로 거리보다 훨씬 먼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사사로운 에피소드를 앞세운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구에서'분지(盆地)적 사고'를 나무랐다는 기사 때문이다. 대구ㆍ경북이 내륙적 사고를 버려야 지역 발전을 꾀할 수 있다며, 대구가 분지라도 생각을 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원론적 충고일 수 있지만, 듣는 이들은 곧장 세종시 논란을 떠올린다. 이 지역 출신 대통령으로서 지역의 수정안 반대에 서운함을 토로한 것으로 볼 만하다.
대통령의'분지론'에 고개를 끄덕인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단 대구 사람이 아니라도 생뚱 맞게 여길 이가 많을 것이 걱정스럽다. 이를 테면 사회심리학적 분석으로 타당한지를 떠나, 대통령이 특정지역의 특성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지혜롭지도 않다. 대구ㆍ경북의 세종시 수정안 반대가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높지 않은 사실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가장 최근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수정안 반대여론은 전북과 광주ㆍ전남, 대전ㆍ충청 지역이 차례로 압도적으로 높다. 원안 찬반 조사에서도 대전ㆍ충청에 이어 부산ㆍ경남ㆍ울산이 대구ㆍ경북보다 찬성이 훨씬 우세하다. 대통령이 고향인 포항과 폐쇄적 분지 대구를 비교하며 열린 사고를 주문한 것과 맞지 않는다. 열린 항구는 전남ㆍ북과 부산ㆍ경남에 아주 많다. 큰 도시는 대개 분지임을 일깨울 것도 없다. 리얼미터>
이 대통령은 나름대로 출신지역을 살갑게 여긴 듯 하다. 그래서 편협한 지역적ㆍ정치적 이해에 얽매이는 잘못을 경계하는 상징적 표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홍보수석이 무슨'TK론'으로 엉뚱한 오해를 부른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TK 지역 정서를 시비하는 것으로 완고한 정치적 편향과 지역적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세종시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의문이다. TK끼리 욕하고 다투는 모습을 다른 지역이 기꺼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지지와 지역적 이해 타산까지 바꿀까 싶다.
상징조작 선전, 효과는 의문
'TK 때리기'는 정치적 상징 조작을 통한 선전(propaganda) 효과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모습은 지난 진보 정권과 학자, 언론 등이 TK의 정치적ㆍ이념적 편향과 폐쇄성을 상징 조작의 주된 재료로 삼은 것과 닮았다. 그 즈음, 선거 때마다 TK 지역 유권자들의 정치적 편향을 비난하면서도 호남의 90%를 훌쩍 넘는 몰표는 눈감은 사이비 학자, 언론이 많다. 폐쇄적 지역주의가 여전한 마당에 대통령과 주변의 선전전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 흥미롭다.
이 대통령과 정부의 답답한 처지는 이해한다. 그렇다고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와 어딘지 비슷한 '대구 분지론'은 엉뚱하다. 왕건이 공주(公州)강, 지금의 금강을 언급한 것은 공교롭다. 사회심리학의 시조 귀스타브 르 봉의 지혜를 빌리면, 대중에게 꿈을 주는 지도자는 성공하고 대중을 각성시키려는 지도자는 실패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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