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네거트 지음ㆍ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발행ㆍ303쪽ㆍ1만2,000원
미국 최고의 풍자 작가로 꼽히는 커트 보네거트가 1965년 발표한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제5도살장> (1969) 이전의 초기 문학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5도살장>
엄청난 유산 상속자이면서도 초라한 고향 마을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엘리엇 로즈워터를 주인공으로, 보네거트는 자본주의 속에서 심화되는 빈부격차, 비인간화 현상을 날카롭게 묘사한다. 천연덕스러운 블랙 유머가 시종 독자의 웃음보를 터뜨린다. 총괄적 서사보다는 개별 에피소드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이 소설의 스타일은 출간 당시로선 매우 획기적이어서 뉴욕타임스에 "이걸 과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서평 기사가 실릴 만큼 논쟁을 일으켰다.
로즈워터가(家)는 남북전쟁 때 무기 장사로 밑천을 마련한 뒤 타락한 공무원들을 매수하며 금융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번 집안이고, 엘리엇은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로즈워터 재단의 이사장. 상류 계급으로 번듯하게 살기 바라는 상원의원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술독에 빠져 공상과학 소설가, 소방관들과 어울리며 기행을 일삼던 엘리엇은 뉴욕을 떠나 낙향, 소방서와 자선사업기관을 운영한다. "난 이 버림받은 미국인을 사랑할 거요. 비록 쓸모 없고 볼품 없는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게 나의 예술작품이 될 거요."(56쪽)
로즈워터 재단의 자문을 맡고 있는 법률회사의 젊고 교활한 변호사 무샤리는 이런 엘리엇을 정신병자로 몰아붙여 재산이 먼 친척 프레드에게 상속되게 한 뒤 막대한 수수료를 챙길 음모를 꾸민다. 그의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다. "훌륭한 조종사가 항상 착륙할 장소를 눈여겨보듯 변호사는 뭉칫돈이 막 손바꿈하려는 상황을 찾아야 한다."(14쪽)
가문의 명예에 먹칠한다는 가족의 비난, 선의를 악용해 무위도식하려 드는 이웃들의 뻔뻔함에도 엘리엇은 끝까지 약자 편에 남고자 한다. 그가 결국 무샤리의 농간에 맞서기 위해 고향을 떠나고,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다시금 가난한 고향 사람들의 수호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代贖)과 고스란히 겹친다. 보네거트는 작품 곳곳에 기독교적 모티프를 삽입했는데, 성경 속 '착한 사마리아인' 일화에 빗대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히스테리성 무관심'을 정신병의 일종인 '사마리안 실조증'으로 명명한 재치도 그 중 하나다.
인간의 심성마저 망가뜨리는 고도 자본주의의 병폐를 단순하고도 명쾌한 선악 구도로 묘파하는 이 소설은 촌철살인의 향연이다. "가난은 창피한 게 아니야. 하지만 차라리 창피한 걸로 끝나는 게 낫지." "돈이란 건조시킨 유토피아라네." "사랑받지 않고 잊히고 싶다면, 이성적으로 행동하라." "의용소방대는 열정적으로 남을 돕는 거의 유일한 예라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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